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관심 갖는 사람만 관심 갖는 철학적 사건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니체와 불교와의 관계다. 왜냐하면 니체는 본인이 '유럽의 부처' 이며, 자신의 철학을 '유럽의 불교철학'이라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니체라는 인물 자체가 서양철학사 내지 현대의 인류 지성에 있어 가장 유명하며, 가장 토대가 되는 사상가이기에 니체에 이러한 주장은 불교권 국가에선 당연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마치 서양철학과 서양지성의 숟가락이라도 얹어 불교의 위대함을 더욱 부풀려보려는 듯, 니체가 불교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했고, 그의 핵심적 사상인 '초인 사상'이 바로 불교의 해탈과 같은 것이며, 니체의 주장대로 니체에 사상은 불교와 유사하다 못해 동일할 것이므로, 불교는 서양지성의 대표격도 감탄하고 찬미한, 서양의 이성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참으로 위대한 종교다! 라는 주장, 주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나오며, 아직도 간간히 이러한 의견과 주장이 학계에선 제시되고 있는 형국이다.
과감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도 아니며 사실인적도 없는 비루하고 무지한 종교적 신앙과 닮은 헛소리다.
이유는 이러하다.
애초부터 니체는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200여년전 서양에 불교가 번역되어 전파되어 쇼펜하우어를 위시한 역사적 지성들이 이에 절대적으로 영향받은건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유럽에선 불교의 사상이 유행이였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처럼 정보가 모두 공개되고 공유되어 있는 세상이 아닌, 그들만의 리그. 즉 정통한 불교 전문가의 어떠한 옳은 지도 한자락 하나없이 불교는 그저 그 나랏말로 번역되어 전파만 된 수준이였기에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많은 당시의 유럽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그리스 철학-그리스도적 시각으로 접근한 잘못된 해석으로 불교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러한 오용, 오해, 불이해가 쇼펜하우어를 시작으로 니체와 그의 후학들, 버드런트 러셀이든 비트겐슈타인이든, 프로이트든 에게도 그대로 유전되기에 이른다.
실제로 니체는 대학생 학부시절 불교관련 강의를 몇 개 듣거나, 쇼펜하우어의 잘못된 불교 이해로부터 공부하고, 불교 번역책 몇 권따위를 읽은게 전부다. 공부량만 놓고 봐도 겨우 강의 몇 강 듣고, 책 몇 개 읽는 수준으로 어떻게 불교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니체가 아무리 천재라 해도, 세상에는 고작 책 한두권 읽고 그 분야의 대가가 될 수 있는 천재는 역사적으로 존재한적이 없다. 그리고 니체는 그걸 가능하게 할정도로 그리 대단한 천재도 딱히 아니다. 여기에 심지어 그가 읽고 공부한 그 불교에 대한 공부도 무지와 오해로 비롯된 수준낮은 불교 해석서 였다. (대표적으로 절대 다수의 학자들은 쇼펜하우어가 불교를 잘못 이해했다고 인정하는데 그 쇼펜하우어의 잘못된 불교이해가 니체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 니체는 불교를 이해하지 못했다.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그가 알고 있는 불교라는 건 사실 불교라기 보단 유럽인들이 제 입맛대로 각색한 불교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불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을 '유럽의 부처'라 주장하고, 자신의 철학을 '유럽의 불교'라고 주장해버렸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유럽의 부처라 주장했는가? 별 것 없다. 단지 무려 2500년전 인도의 고타마 싯타르타라 하는 역사적 인물이 신을 부정하고, 영혼을 믿는 잘못에 대해 설파하며 그런 상상적 매개물이 아닌 자기 스스로로 부터에 인간실현을 주장했다는 실증적 측면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니체의 시대에는 아직도 그리스도교가 전체적인 사회상이였지만 - 심지어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 뉴턴과 다윈을 필두로 과학의 합리적 사고라는 새로운 시각의 등장으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윤리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점점 몰락해 나가는 시점에서 새로운 인류 통합의 사상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이런 절박한 시점에서 그들이 새로 접하게 된 이 불교철학이야 말로 그들에게 정확히 알맞고 필요한 신사상이였다. 그리고 이를 무려 2500년 전에 설파했다는 놀라운 시사성 때문에 니체는 불교를 대단히 수준 높은 사상 이며 유일하게 가치 있는 종교라 순순히 인정한다. 그리고 이 불교로부터 니체의 철학은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렇듯 니체의 철학의 바탕은 니체 본인도 인정하듯 불교다.
왜냐하면 니체는 불교를 기조로 해서 불교로 부터 스스로가 인정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초인사상 등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해 반하며 나온 사상들도 결국 그 무엇에 대해 영향받은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이 유럽의 부처이고, 자신의 사상을 유럽의 불교라고 천명한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역시나 정말 안타깝고 우습게도, 니체 본인은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제대로 이해 못한 불교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철학을 전개해 탄생시킨 뒤 자신을 유럽의 부처라 칭하는 이 사람을 보라. 참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황당한 일이 유럽과 전 세계의 이성과 지성의 토대가 되었다!)
그럼 니체는 무엇을 잘못 이해했는가?
먼저 이를 알려면 최소한의 불교 철학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 그 최소한의 기본 사상이란 바로 무상, 고, 무아이다. 니체는 이 무상,고,무아 중 무상과 고는 어느정도 수용을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무아'를 니체는 부정하며 지극히 반불교적인 태도로 엇나간다.
'무아'라 함은 단적으로 말해 '자아 없음'인데 자아가 없다는 이 가르침은 순수히 따르기가 매우 어려우며,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까지 자아내는 일이기에, 특히 그리스도 철학(아리스토텔레스 부터 이어져온 영혼이 있고, 이 영혼은 육체보다 더 고귀하다는 사상에서 부터 이 영혼을 지옥과 천국으로 까지 보낸 그리스도 철학까지)에 절대적 영향을 받은 니체와 그 시대의 사람들은 -현대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지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였다.
이에 니체는 '자기소멸'이란 두려움과 그 '에고적 반발심'에 의해 결국 무아사상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이로 인해 불교가 잘못되었다며 공격하고, 무아와 정반대의 개념인 '자기 자아의 절대적 힘을 이야기한 '힘에의 의지, 초인 사상'과 같은 수준낮은 궤변'을 내놓기에 이른다. -어찌 되었건, 힘에의 의지, 초인 사상이 불교에 대한 특정부분의 부정으로 부터 탄생된 것이기에 이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부터 탄생한 철학이 맞다. - 이건 마치, 기존의 사상이나 종교로 부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개혁하여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분리되어 나가듯, 기존 사상에 대한 반목으로 인해 촉발된 일종의 반항이다. 그럼에도 이들 종교를 아브라함 계열 종교라는 공통으로 묶듯, 니체는 어찌되었건 자신의 사상이 불교사상에서 부터 촉발되었으므로 자신의 철학을 '유럽적인 불교'라 칭한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불교의 시각에서 보면 니체는 끝끝내 '무아'를 받아들이지 못한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범부이자 중생일 뿐이며, 결국 자신만의 그 에고적 욕망과 망상에 집착하며 고통을 더욱 증폭하며 사는 비참한 한 개인일 뿐이다. (실제로 니체는 정신병으로 고통받으며 비참하게 죽었다. ) 니체는 이제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제는 아예 작정하고 불교사상에 정반대되는 개념들을 설파한다. '인간의 삶은 고통이다. 라는 불교에 기본 전개는 수용하면서도 불교와는 정반대되는 고통과의 대결을 긍정한다. 그리고 윤회에 대해선 '영원회귀'로 맞서며 오히려 영원히 반복되며 살아가는 것 또한 긍정해야 함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세상이 변하고 무상한 것에 대해서도 역시나 그와의 대결로써 그리스도인과 강인한 고대 전사들을 예로 들며 강력히 맞서 싸워 극복해야함을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니체는 알려진대로 반기독교적인 인물이라기 보단 오히려 반불교적인 인물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불교의 철학을 계승하는 사람인가? 니체는, 불교의 철학으로부터 시작했고 불교의 철학으로부터 가장 크게 영향받은 사람이긴 하지만, 결국 불교의 반대한 불교의 탈을 쓴 반불교적인 인간이였을 뿐이다. 그러니 유사점은 당연히 있게지만 - 사실 무슨 유사점인가? 니체가 불교의 배다른 자식인데. 니체가 불교의 어떤 면에선 자식이기에 불교와 닮을 순 있다. 그렇지만 결국 배다른 자식이다. - 이렇듯 결국 근본적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절대로 불교와 같지 않다.
솔직해지자, 니체의 철학은 결국 부처의 삼법인을 어느정도는 수용하면서도 행동방식은 정반대로 펼쳐나간 불교의 청개구리 같은 철학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니체는 삶이 부처의 말대로 무상하며, 고통에 가득하지만. 이러한 무상과 고통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부처의 가르침은 거부하고, 지극히 (잘쳐줘야)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시각으로 다시 되돌아가 행동하기로 마음 먹는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무아사상은 본인이 소멸된다는 두려움때문에 거부하며 차라리 에고적 욕망을 해도 더욱 강력히 하여 자신의 자아감을 강화하기로 결정까지 한다.
니체는 기독교와 형이상학을 인간을 병약하게 만드는 현실도피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힘에의 의지' '초인' '영원회귀'와 같은 정확히 형이상학적이고 기독교적인 현실도피를 만들어내 그곳으로 도피하는 자기모순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에고와 자아감을 위협하는 불교의 사상 또한 잘못된 것이라 부정하고 사상적 패륜을 저지르며 비판한다. 그 이유는 니체가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무아사상은 자아가 없으므로 '수동적인 니힐리즘' 적으로 산다는 게 아니라 자아가 없음을 알고 살아가므로 오히려 니체가 뜻한대로 '초인'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지적 상태가 됨을 뜻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라. 사실을 정확히 알거나, 이를 인정하지 못한채로, 그래서 사실이 아닌것을 기반으로 산다면 어떻게 제대로 살 수 있겠는가? 이미 신경과학적 그리고 뇌과학적으로 자아가 없음이 증명되어서, 무아는 사실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이제 무아는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어 판명되었다.)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심신이원론적이고 에고적인 망상에 따라 살아가야 하고, 심지어 더욱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이 니체의 말을 따르면서 어떻게 제대로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고로 니체는 결국 실패 했다. 니체는 신과 함께 죽었다.
자신을 유럽의 부처이며, 자신의 철학을 유럽의 불교라 자청하면서도, 실제로는 부처와 불교의 사상을 그 누구보다 반대하며, 사실은 그가 그토록 비판한 지극히 기독교적인 마음가짐으로 살다가 죽은 이 니체의 유일한 순기능은 그래도 불교를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 이게 전부다. 결국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니체와 불교를 교차검증하며 니체와 불교의 유사성이나 차이성을 이야기하는 사람 들에게 간단히 묻고 싶은 게 있다. 니체가 무아의 위배되는 정확히 완벽히 에고적이고 자아적인 삶을 살고, 그러한 철학을 주창해냈는데 이 이상 니체와 불교의 어떤 이야기를 굳이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을까? 불교 입장에서 보면 니체는 그저 어리석고 멍청한 집착적이고 에고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그를 왜 자꾸 불교와 엮으려 하는가?
니체의 철학이 결국 불교를 발판으로 한 서양의 고대,중세,근대 철학에 재반복, 재생산 이였을 뿐임을 그 누구보다 잘알면서 왜 그렇게 니체와 불교의 =부등호를 성립하기 위해 애를 쓰는가? 결국 니체의 철학은 불교의 탈을 뒤집어쓴 에고적인 기독교 철학 아닌가?
상대를 굴복하고 지배하며, 힘에의 의지로 부터 인간은 긍정될 수 있다는 서양의 짐승적인 지배 사상, 곧 고대 그리스적인 사상에다 기독교적 구원에 초인이란 이름을 명명하고, 고통은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서양의 지배적인 마음상태가 구현된 지극히 아주 지극히 기독교적인 철학을 니체는 불교까지 끄집어들어 리모델링 했을 뿐이다.
그러니 이에 호응하는 같은 문화권의 서양인들에게 니체의 사상은 각광받을런지 몰라도. 결국 궁극적으로 니체는 불교와 엮을래야 엮을 수 없는 인물과 그런 철학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교사상과 기존의 기독교 사상과 그리스 철학을 제멋대로 한데 뒤섞어 만든 니체표 잡탕찌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니체의 이런 잡탕찌개를 탐내하며 한 입이라도 더 먹으려 하는가?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자칭, 타칭 불교의 정통하다는 대가들이 이런 한심한 꼴을 보이고 있다는 것에 혐오감까지 느낀다.
사실 니체와 불교의 관계는 이 단 한문장으로 완벽하게 설명가능하다.
니체는 무아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아와 에고의 강화를 역설했다.
이 문장에 조금 더 추가설명을 하자면,
그래서 니체는 자신의 자아와 에고감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불교를 재해석 했다.
그 재해석 방법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낙후된 철학과 기독교적인 시각을 통한 재해석이다.
그렇기에 니체의 철학을 불교의 탈을 쓴 기독교적 사상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불교를 새로운 대안으로 여겼으나, 결국 오랫동안 형성된 자신의 협소한 아리스토텔레스-기독교철학적 사고관에 의해 불교를 완전히 수용하진 못하고, 결국 불교를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적으로 해체하여 재창조 해버린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교조주의와 한계를 극렬히 비판하면서도 결국 기독교주의적인 자신의 사상을 불교의 재해석을 통해 재탄생하여 신의 죽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로인해, 니체의 세부적인 모순점들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불교를 들먹이며 결국 본인이 그렇게 혐오해마지않던 기독교적인 철학을 완성했다는 이 사실은 결국 니체의 한계와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마치, 부모(기독교)를 혐오하면서도 결국 부모(기독교)를 닮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에 전형의 철학버젼을 니체에게 보는 것 같다. 그런 주제에 '나는 부모랑은 달라!' 하는 공허한 외침은 '나는 유럽의 부처이다!' 하는 니체의 외침과 오버랩시키며 이 글을 여기서 끝낸다.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답글삭제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b
삭제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답글삭제상당히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만, 쇼펜하우어 사상과 불교를 니체 사상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면 동일선상이 되는 기준이 어디던지 무조선 둘 중 하나는 패배하게 되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니체 사상이 제시하는 위버멘쉬의 인물상은 세상에 등장한 위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니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쇼펜하우어 사상은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철저한 자기긍정을 이룬 이순신 같은 인물의 유형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니체의 힘에의 의지 같은 개념은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 현실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현실 도피의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니체가 쇼펜하우어 사상이나 불교를 보고 아쉬워한 이유도 현실 직시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답글삭제니체 사상은 그 당시의 서양 철학에 비하면 현실적이지만, 쇼펜하우어 사상과 불교 철학에 비하면 이상적입니다. 다만 니체 사상의 이상성은 현실성을 갖다 버린 것이 아니라,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칸트처럼 현실성까지도 품으려고 했던 것이며 이것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다고 니체가 비판한 기독교나 합리주의와 분명히 차별되는 것입니다. 다만 쇼펜하우어 사상과 불교가 현실적이지만 이상적이지 않다며 염세주의라고 평가한 건 니체의 잘못이 맞으며, 니체가 소극적이라고 불만을 가지는 쇼펜하우어 사상과 불교도 결국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