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8일 목요일

#그 소설의 문체로 쓰는 감상평(2)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 사탄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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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 소설의 특정 문체로 쓰는 감상평은 머리에 더 남고, 기억에 더 남을 것 같아. 좀 더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고 말야. 아님 말고.



#그 소설의 문체로 쓰는 감상평(2)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 사탄탱고



 종소리가 들렸다. Sysout은 게슴츠레 뜬 눈을 반죽하듯 비비며 모니터를 응시 한다. ('무슨 뜻인가!') 어떻게 써야 하나 궁리해보지만, 궁리해도 소용 없을 듯 하다. (문체가 보통 문체가 아니기 때문인데, 따라해도 따라한게 아닐게 될게 뻔하니 차라리 시도 조차 않는게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 부질없는 일종의 희망은 군화발에 낀 진흙 마냥 긁어내 던져버리고 어설픈 흉내를 길게 하는 것 보단 짧게 침을 뱉듯 내뱉고 내빼는게 산책일 것 같다. Sysout은 그저 그 외로운 소녀가 가장 인상 깊었고 안타까웠다. 어떻게 그 불쌍한 소녀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전개가 가능한지 놀라울 따름이고, 그 세세함 만큼 가슴 저밈도 크게 느껴진다. '그래! 사실 이런 훌륭한 심리적 묘사가 이 책의 명성을 만든것이지! 그리고 그 능력과 재능이 이 작가에게 있는 것이고!'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발버둥치며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다 마지막 발악을 하고 몸을 튕기듯 나 또한 자판을 튕겨본다. - "세상에! 이렇게 인간 본성을 꿰뚫는 책도 드물다고!" -
 종소리가 들렸다. Sysout은 게슴츠레 뜬 눈을 반죽하듯 비비며 모니터를 응시 한다. 그는 쉬지않고 자판을 두들기며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처음 부분만 좀 지루하고, 읽어나갈 수록 깊게 몰입되어 빠져들게 하는 대단한 매력의 소설이였다. 'Sysout은 이제 마지막 문장을 쓰고 글을 마친다.'


#그 소설의 문체로 쓰는 감상평(1) : 윌리엄 포크너 - 소리와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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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었다. 그런데 책만 읽었다! 라고 끝내기엔 아쉽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일단 인간인 나 또한 독서를 통해 느낀 감동과 감상은 허공에 떠다니는 방구 마냥 곧 분해되어 사라질게 뻔하다. 그러니 나도 남들 다하는 감상평 일명 독후감을 써서 이 사이버 공간의 유물로써 후대에 전달해주기로 했다. 근데 그냥 쓰는 독후감은 재미가 없어도 상당히 없으니, 내가 읽은 책의 문체를 흉내내어 감상평을 남겨보기로 한다. 왜? 독특하니까. 그리고 독특한건 그 자체로 의미 있으니까.



# 그 소설의 문체로 쓰는 감상평(1) : 윌리엄 포크너 - 소리와 분노



 2010년 / 5월 / 29일

 시계를 본다. 오전4시 38분이다. 나는 이 이른 새벽녘에 감상평을 쓰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타닥이는 타이핑 소리와 눌러지는 자판의 감촉이 누를적마다 새롭다. 캐디! 이 책은 내게 캐디!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푸른 하늘이였다가 비가 내리는데 처음엔 작게 내렸다 점점 크게 내리기에 조급함이 점차 증폭되었다. 소리와 분노? 이 책?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낸다 언젠가 한번 이 책이 대단한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나는 나의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림자에 다시 그림자를 씌우며 글을 마저 쓰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 부터가 일반적이지 않는데? 그리고 윌리엄 포크너?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이라니까. 그래도 왠지 끌리는 걸? 그리고 대단한 책이라고 호평이 자자 했으니까. 일단 읽어보면 알겠지.
재밌다. 새롭다. 일반적이지 않다. 미쳤지만 천재인 과학자가 실험을 하듯 언어적으로 실험하는 윌리엄 포크너의 그 용기와 시도에 절로 박수가 쳐진다. 이게 진짜 소설이란 생각 마저 든다. 당신에게는 이런 소설이 있나? 너에게도 너에게도 이런 소설이 있나? 반납일은 언제 언제 까지 입니다. 설마 실망스러우면 어쩌지? 새롭다 못해 사실상 처음 맞는 문체와 전개 방식에 어안이 벙벙 하다 못해 약간의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그저 순전히 기우일 뿐이고,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읽어나가다 보면 오히려 그 새로움의 감동을 받는 순간까지 온다. 단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걸작이라 할 순 없어 그렇지만 새롭다는 것만이 걸작의 이유 중 하나는 될 수 있어 애초에 이 책은 100년전에 나온 책이라고 새롭고 뭐고 할것도 없어 원래 이런 류의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모든 것들을 싫어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물론 모든 소설이 그렇듯 언제나 케바케다. 내게 좋은게 항상 모두에게 좋을 순 없다. 그리고 모두에게 좋은게 내게 좋지 않듯이, 그렇기에 나 또한 이 책이 모두에게 좋다고 주장하진 않을거다. 다만 분명한 것 한가지는 자신의 시야와 사고의 가짓수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면 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해 인내심이 없고 그렇게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면 읽으면 안돼 정말 실망하고 어쩌면 화를 낼수도 있어 그러니까 자신이 그렇게 책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왠만하면 읽지 않는게 좋아 이 책을 읽으려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거야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다시 이 감상평을 읽을 땐 무릎을 탁! 치며 미소짓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각을 서로 공유하는 사이니까. 


2020년 5월 18일 월요일

#제가 먹고 완치한 영양제 리스트 공개!






 제가 '만성 두드러기'라는 증상을 생에 처음으로 앓고 나서부터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이 난치성, 즉 불치병 피부질환으로 인해 극단적인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병원을 가도, 한의원을 가봐도, 몸에 좋다는 그 어떤 인터넷 글을 탐닉해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정말 상상을 초월할 이 두드러기의 고통을 무력하게 직면한 저는, 스스로 논문을 찾고 읽어보며 해답을 찾았고, 실제로 제 자신에게 제가 알아낸 영양학적 지식을 바탕으로하여 그 불치병으로부터 완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로인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이 정보를 공유한지 어언 1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고, 기적적으로 두드러기를 완치하셨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분도 만성 두드러기가 완치되지 않았다고 하신 분 없습니다. 제가 대단해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정말 간단한 영양학적 지식만 있다면 누구라도 쉬이 해결할 수 있는 질환이였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번뜩이는 댓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순수하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그 어떤 상업적이고 홍보나 광고 비슷한 느낌의 문장하나도 쓰지 않기 위해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사람들이 원하셔도 제가 먹었던 영양제도 알려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분들의 후기댓글이 제 마음을 증명해주셨고. 이쯤되면 공개해도 되겠다 싶어. 이렇게 공개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상업적인 혹은 홍보하는 여타 쓰레기 같은 사람들과 동일시 되고 싶진 않기 때문에 어떤 브랜드의 어떤 영양제를 먹었는지는 절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간단합니다 '아이허브'에 가셔서 해당 영양제 중 가장 많이 팔리고 인기 좋은 영양제 사서 드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더 부연설명하자면 영양제를 먹고 치유한 현재의 1년동안 두드러기 손톱할톨도 나지 않고 계속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코로나가 더 무섭죠 ㅎㅎ



 제가 먹고 효과를 본 영양제

1. 비타민C 1000mg
2. 비타민B Complex (비타민B군 전용 비타민)
3. 멀티 미네랄 (미네랄 전용 영양제)
4. 오메가3 
5. 유산균 (유산균은 300억 500억 이상으로 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100억 미만 복용 했습니다.)
6. 퀘르세틴
7. 메티오닌
8. 종합비타민
9. 비타민D 5000IU 이상
# 붉은 글씨로 체크한 건 제가 체감상 가장 크게 좋다고 느꼈던 영양제 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하나 따로 실험하며 복용하질 않아 이것만 먹어도 된다! 하는 확신은 솔직히 못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영양제 라인업들은 만성 두드러기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영양제로써 가장 많이 복용하는 영양제들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느 브랜드의 어느 영양제를 복용했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에게 솔직하고 과감하게 그냥 터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국내영양제'는 왠만하면 비추천 입니다.왜냐하면 국내영양제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게 GMO와 알레르기 성분으로 만드는 데다가, 정확한 검증조차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어, 심심찮게 국산 영양제 복용하시고 사망하신 분들이 간혹 나옵니다. 여러분들 중에 그런 뉴스기사 보신분들도 계실겁니다.
* 물론, 모든 국내영양제가 그렇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잘찾아보시면 괜찮고 안전한 국내영양제도 분명 있습니다. 이는 단지 저의 주관적 의견임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그에 비해 해외에서 구매하시는 영양제는(특히, 메이커 브랜드) 어지간하면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니 그냥 '아이허브' 사이트 가셔서 회원가입 하시고 구매해서 드십시오. 구글에서 '아이허브 회원가입' 방법 검색하셔서 그대로 따라만하시면 10분이면 회원가입하고, 네이버쇼핑몰 보다 더 쉽게 이용가능 합니다.

그러니 그냥 아이허브 가셔서, 제가 추천한 해당 영양제 검색하시고 가장 잘팔리고 인기있고 마음에 드시는거 사서 드십시오. 왠만하면 다 또이또이 합니다. 국내 영양제나 유명하지 않은 해외 메이커만 아니면 됩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잘모르시는 분들도 계실테니 그런 분들은 그냥 아이허브에서 구매하시면 속이 편합니다. 물론 쿠팡이나 다른 해외직구에서 구매하고 싶으신 분들도 메이커만 확인하시고 구매하십시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의 질환이 깨끗이 치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모두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경감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2020.05.19일 추가 내용
국내외 전 세계 영양제 고수들이 이용하는 '아이허브'라는 세계적인 영양제 판매 사이트가 있습니다. 해외직구 한번이라도 해보신적 있으신 분들은 정말 간편하고 쉽게 이용가능한 사이트 입니다. (안해보셨더라도 구글에서 검색해서 하시면 쿠팡보다 더 쉽게 회원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설명한 영양제들도 전부 저는 '아이허브'에서 구매한답니다.

저는 지난 1여년 동안 굳이 '아이허브' 추천인 코드를 명시하지 않고, 선한 마음으로 해당정보를 공유만 해왔으나, 추천인 코드라는게 무슨 대단한 홍보나 어떤 광고가 아니라, '아이허브'에서 영양제를 구매하시고 추천인 코드의 제 코드를 입력해주시면 서로가 영양제를 살때 할인받는 어떻게 보면 품앗이 개념의 별거아닌 제도 입니다.
(참고로 아이허브에서 구매하실 때, 영양제 갯수는 6개 이하, 15만원 이하로 주문하셔야 합니다. 그 이상으로 추가 주문하시면 통관에서 걸립니다.)

그렇지만 제 추천인 코드를 입력해주시면 입력해주신 분도 영양제 할인을 받기 때문에 이것보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제도도 없다고 봅니다. 어차피 사는 영양제 서로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더 도움드리고자, 제 코드를 이곳에 굳이 기제하니. 현재 많은 이들이 제글로 인해 만성두드러기를 완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부개념으로라도 '아이허브'에서 영양제를 구매하실 때 제 코드를 입력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추천인 코드는 ALL2624 입니다.


구매하실 때, 저 빨간색 창 안에 제 추천인 코드를 입력해주시면 됩니다.
뭔가 상업적인 느낌이 들어 왠만하면 남들 쉽게 다 홍보하는 아이허브 코드도 조심스러워 추천못했지만, 이젠 제 진심을 믿어주시는 분들이 댓글에 많이 나타나시는 것 같아.

서로가 서로에게 더 선한 도움을 주고 받기 위해 이렇게 추천인 코드를 공개합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고, 하기 싫으면 안해주셔도 됩니다. 저는 그저 모두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더 경감되었으면 하고 여전히 바라는 마음이 더 큽니다. 감사합니다.





니체와 불교, 멍청한 너무나 멍청한 !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관심 갖는 사람만 관심 갖는 철학적 사건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니체와 불교와의 관계다. 왜냐하면 니체는 본인이 '유럽의 부처' 이며, 자신의 철학을 '유럽의 불교철학'이라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니체라는 인물 자체가 서양철학사 내지 현대의 인류 지성에 있어 가장 유명하며, 가장 토대가 되는 사상가이기에 니체에 이러한 주장은 불교권 국가에선 당연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마치 서양철학과 서양지성의 숟가락이라도 얹어 불교의 위대함을 더욱 부풀려보려는 듯, 니체가 불교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했고, 그의 핵심적 사상인 '초인 사상'이 바로 불교의 해탈과 같은 것이며, 니체의 주장대로 니체에 사상은 불교와 유사하다 못해 동일할 것이므로, 불교는 서양지성의 대표격도 감탄하고 찬미한, 서양의 이성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참으로 위대한 종교다! 라는 주장, 주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나오며, 아직도 간간히 이러한 의견과 주장이 학계에선 제시되고 있는 형국이다.

 과감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도 아니며 사실인적도 없는 비루하고 무지한 종교적 신앙과 닮은 헛소리다. 

 이유는 이러하다.

 애초부터 니체는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200여년전 서양에 불교가 번역되어 전파되어 쇼펜하우어를 위시한 역사적 지성들이 이에 절대적으로 영향받은건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유럽에선 불교의 사상이 유행이였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처럼 정보가 모두 공개되고 공유되어 있는 세상이 아닌, 그들만의 리그. 즉 정통한 불교 전문가의 어떠한 옳은 지도 한자락 하나없이 불교는 그저 그 나랏말로 번역되어 전파만 된 수준이였기에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많은 당시의 유럽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그리스 철학-그리스도적 시각으로 접근한 잘못된 해석으로 불교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러한 오용, 오해, 불이해가 쇼펜하우어를 시작으로 니체와 그의 후학들, 버드런트 러셀이든 비트겐슈타인이든, 프로이트든 에게도 그대로 유전되기에 이른다. 

 실제로 니체는 대학생 학부시절 불교관련 강의를 몇 개 듣거나, 쇼펜하우어의 잘못된 불교 이해로부터 공부하고, 불교 번역책 몇 권따위를 읽은게 전부다. 공부량만 놓고 봐도 겨우 강의 몇 강 듣고, 책 몇 개 읽는 수준으로 어떻게 불교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니체가 아무리 천재라 해도, 세상에는 고작 책 한두권 읽고 그 분야의 대가가 될 수 있는 천재는 역사적으로 존재한적이 없다. 그리고 니체는 그걸 가능하게 할정도로 그리 대단한 천재도 딱히 아니다. 여기에 심지어 그가 읽고 공부한 그 불교에 대한 공부도 무지와 오해로 비롯된 수준낮은 불교 해석서 였다. (대표적으로 절대 다수의 학자들은 쇼펜하우어가 불교를 잘못 이해했다고 인정하는데 그 쇼펜하우어의 잘못된 불교이해가 니체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 니체는 불교를 이해하지 못했다.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그가 알고 있는 불교라는 건 사실 불교라기 보단 유럽인들이 제 입맛대로 각색한 불교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불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을 '유럽의 부처'라 주장하고, 자신의 철학을 '유럽의 불교'라고 주장해버렸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유럽의 부처라 주장했는가? 별 것 없다. 단지 무려 2500년전 인도의 고타마 싯타르타라 하는 역사적 인물이 신을 부정하고, 영혼을 믿는 잘못에 대해 설파하며 그런 상상적 매개물이 아닌 자기 스스로로 부터에 인간실현을 주장했다는 실증적 측면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니체의 시대에는 아직도 그리스도교가 전체적인 사회상이였지만 - 심지어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 뉴턴과 다윈을 필두로 과학의 합리적 사고라는 새로운 시각의 등장으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윤리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점점 몰락해 나가는 시점에서 새로운 인류 통합의 사상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이런 절박한 시점에서 그들이 새로 접하게 된 이 불교철학이야 말로 그들에게 정확히 알맞고 필요한 신사상이였다. 그리고 이를 무려 2500년 전에 설파했다는 놀라운 시사성 때문에 니체는 불교를 대단히 수준 높은 사상 이며 유일하게 가치 있는 종교라 순순히 인정한다. 그리고 이 불교로부터 니체의 철학은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렇듯 니체의 철학의 바탕은 니체 본인도 인정하듯 불교다. 

 왜냐하면 니체는 불교를 기조로 해서 불교로 부터 스스로가 인정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초인사상 등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해 반하며 나온 사상들도 결국 그 무엇에 대해 영향받은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이 유럽의 부처이고, 자신의 사상을 유럽의 불교라고 천명한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역시나 정말 안타깝고 우습게도, 니체 본인은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제대로 이해 못한 불교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철학을 전개해 탄생시킨 뒤 자신을 유럽의 부처라 칭하는 이 사람을 보라. 참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황당한 일이 유럽과 전 세계의 이성과 지성의 토대가 되었다!)  

 그럼 니체는 무엇을 잘못 이해했는가? 
먼저 이를 알려면 최소한의 불교 철학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 그 최소한의 기본 사상이란 바로 무상, 고, 무아이다. 니체는 이 무상,고,무아 중 무상과 고는 어느정도 수용을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무아'를 니체는 부정하며 지극히 반불교적인 태도로 엇나간다. 

 '무아'라 함은 단적으로 말해 '자아 없음'인데 자아가 없다는 이 가르침은 순수히 따르기가 매우 어려우며,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까지 자아내는 일이기에, 특히 그리스도 철학(아리스토텔레스 부터 이어져온 영혼이 있고, 이 영혼은 육체보다 더 고귀하다는 사상에서 부터 이 영혼을 지옥과 천국으로 까지 보낸 그리스도 철학까지)에 절대적 영향을 받은 니체와 그 시대의 사람들은 -현대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지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였다. 

 이에 니체는 '자기소멸'이란 두려움과 그 '에고적 반발심'에 의해 결국 무아사상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이로 인해 불교가 잘못되었다며 공격하고, 무아와 정반대의 개념인 '자기 자아의 절대적 힘을 이야기한 '힘에의 의지, 초인 사상'과 같은 수준낮은 궤변'을 내놓기에 이른다. -어찌 되었건, 힘에의 의지, 초인 사상이 불교에 대한 특정부분의 부정으로 부터 탄생된 것이기에 이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부터 탄생한 철학이 맞다. - 이건 마치, 기존의 사상이나 종교로 부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개혁하여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분리되어 나가듯, 기존 사상에 대한 반목으로 인해 촉발된 일종의 반항이다. 그럼에도 이들 종교를 아브라함 계열 종교라는 공통으로 묶듯, 니체는 어찌되었건 자신의 사상이 불교사상에서 부터 촉발되었으므로 자신의 철학을 '유럽적인 불교'라 칭한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불교의 시각에서 보면 니체는 끝끝내 '무아'를 받아들이지 못한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범부이자 중생일 뿐이며, 결국 자신만의 그 에고적 욕망과 망상에 집착하며 고통을 더욱 증폭하며 사는 비참한 한 개인일 뿐이다. (실제로 니체는 정신병으로 고통받으며 비참하게 죽었다. ) 니체는 이제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제는 아예 작정하고 불교사상에 정반대되는 개념들을 설파한다. '인간의 삶은 고통이다. 라는 불교에 기본 전개는 수용하면서도 불교와는 정반대되는 고통과의 대결을 긍정한다. 그리고 윤회에 대해선 '영원회귀'로 맞서며 오히려 영원히 반복되며 살아가는 것 또한 긍정해야 함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세상이 변하고 무상한 것에 대해서도 역시나 그와의 대결로써 그리스도인과 강인한 고대 전사들을 예로 들며 강력히 맞서 싸워 극복해야함을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니체는 알려진대로 반기독교적인 인물이라기 보단 오히려 반불교적인 인물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불교의 철학을 계승하는 사람인가? 니체는, 불교의 철학으로부터 시작했고 불교의 철학으로부터 가장 크게 영향받은 사람이긴 하지만, 결국 불교의 반대한 불교의 탈을 쓴 반불교적인 인간이였을 뿐이다. 그러니 유사점은 당연히 있게지만 - 사실 무슨 유사점인가? 니체가 불교의 배다른 자식인데. 니체가 불교의 어떤 면에선 자식이기에 불교와 닮을 순 있다. 그렇지만 결국 배다른 자식이다. - 이렇듯 결국 근본적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절대로 불교와 같지 않다. 

 솔직해지자, 니체의 철학은 결국 부처의 삼법인을 어느정도는 수용하면서도 행동방식은 정반대로 펼쳐나간 불교의 청개구리 같은 철학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니체는 삶이 부처의 말대로 무상하며, 고통에 가득하지만. 이러한 무상과 고통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부처의 가르침은 거부하고, 지극히 (잘쳐줘야)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시각으로 다시 되돌아가 행동하기로 마음 먹는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무아사상은 본인이 소멸된다는 두려움때문에 거부하며 차라리 에고적 욕망을 해도 더욱 강력히 하여 자신의 자아감을 강화하기로 결정까지 한다.

 니체는 기독교와 형이상학을 인간을 병약하게 만드는 현실도피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힘에의 의지' '초인' '영원회귀'와 같은 정확히 형이상학적이고 기독교적인 현실도피를 만들어내 그곳으로 도피하는 자기모순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에고와 자아감을 위협하는 불교의 사상 또한 잘못된 것이라 부정하고 사상적 패륜을 저지르며 비판한다. 그 이유는 니체가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무아사상은 자아가 없으므로 '수동적인 니힐리즘' 적으로 산다는 게 아니라 자아가 없음을 알고 살아가므로 오히려 니체가 뜻한대로 '초인'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지적 상태가 됨을 뜻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라. 사실을 정확히 알거나, 이를 인정하지 못한채로, 그래서 사실이 아닌것을 기반으로 산다면 어떻게 제대로 살 수 있겠는가? 이미 신경과학적 그리고 뇌과학적으로 자아가 없음이 증명되어서, 무아는 사실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이제 무아는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어 판명되었다.)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심신이원론적이고 에고적인 망상에 따라 살아가야 하고, 심지어 더욱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이 니체의 말을 따르면서 어떻게 제대로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고로 니체는 결국 실패 했다. 니체는 신과 함께 죽었다.


 자신을 유럽의 부처이며, 자신의 철학을 유럽의 불교라 자청하면서도, 실제로는 부처와 불교의 사상을 그 누구보다 반대하며, 사실은 그가 그토록 비판한 지극히 기독교적인 마음가짐으로 살다가 죽은 이 니체의 유일한 순기능은 그래도 불교를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 이게 전부다. 결국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니체와 불교를 교차검증하며 니체와 불교의 유사성이나 차이성을 이야기하는 사람 들에게 간단히 묻고 싶은 게 있다. 니체가 무아의 위배되는 정확히 완벽히 에고적이고 자아적인 삶을 살고, 그러한 철학을 주창해냈는데 이 이상 니체와 불교의 어떤 이야기를 굳이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을까? 불교 입장에서 보면 니체는 그저 어리석고 멍청한 집착적이고 에고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그를 왜 자꾸 불교와 엮으려 하는가? 

니체의 철학이 결국 불교를 발판으로 한 서양의 고대,중세,근대 철학에 재반복, 재생산 이였을 뿐임을 그 누구보다 잘알면서 왜 그렇게 니체와 불교의 =부등호를 성립하기 위해 애를 쓰는가? 결국 니체의 철학은 불교의 탈을 뒤집어쓴 에고적인 기독교 철학 아닌가? 

상대를 굴복하고 지배하며, 힘에의 의지로 부터 인간은 긍정될 수 있다는 서양의 짐승적인 지배 사상, 곧 고대 그리스적인 사상에다 기독교적 구원에 초인이란 이름을 명명하고, 고통은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서양의 지배적인 마음상태가 구현된 지극히 아주 지극히 기독교적인 철학을 니체는 불교까지 끄집어들어 리모델링 했을 뿐이다. 

 그러니 이에 호응하는 같은 문화권의 서양인들에게 니체의 사상은 각광받을런지 몰라도. 결국 궁극적으로 니체는 불교와 엮을래야 엮을 수 없는 인물과 그런 철학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교사상과 기존의 기독교 사상과 그리스 철학을 제멋대로 한데 뒤섞어 만든 니체표 잡탕찌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니체의 이런 잡탕찌개를 탐내하며 한 입이라도 더 먹으려 하는가?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자칭, 타칭 불교의 정통하다는 대가들이 이런 한심한 꼴을 보이고 있다는 것에 혐오감까지 느낀다. 

 사실 니체와 불교의 관계는 이 단 한문장으로 완벽하게 설명가능하다.
니체는 무아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아와 에고의 강화를 역설했다. 
이 문장에 조금 더 추가설명을 하자면,
그래서 니체는 자신의 자아와 에고감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불교를 재해석 했다. 
그 재해석 방법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낙후된 철학과 기독교적인 시각을 통한 재해석이다.
그렇기에 니체의 철학을 불교의 탈을 쓴 기독교적 사상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불교를 새로운 대안으로 여겼으나, 결국 오랫동안 형성된 자신의 협소한 아리스토텔레스-기독교철학적 사고관에 의해 불교를 완전히 수용하진 못하고, 결국 불교를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적으로 해체하여 재창조 해버린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교조주의와 한계를 극렬히 비판하면서도 결국 기독교주의적인 자신의 사상을 불교의 재해석을 통해 재탄생하여 신의 죽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로인해, 니체의 세부적인 모순점들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불교를 들먹이며 결국 본인이 그렇게 혐오해마지않던 기독교적인 철학을 완성했다는 이 사실은 결국 니체의 한계와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마치, 부모(기독교)를 혐오하면서도 결국 부모(기독교)를 닮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에 전형의 철학버젼을 니체에게 보는 것 같다. 그런 주제에 '나는 부모랑은 달라!' 하는 공허한 외침은 '나는 유럽의 부처이다!' 하는 니체의 외침과 오버랩시키며 이 글을 여기서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