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불교와 관련된 소설 "싯다르타"를 오래전에 썼다는걸 이제서야 알게된 나는 대단한 기대감과 흥미를 양쪽에 낀채로 소설 "싯다르타"를 구해 집어들고 단순에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대단한 기대감은 대단한 실망감으로, 대단한 흥미는 대단한 절망감으로 바뀌었는데 이유는 이렇다.
헤르만 헤세는 불교에 대해서 모른다. 아니 전혀 모른다. 그러니까 불교 사상과 철학의 피상적인 껍데기 부분은 분명 잘알고 있어보인다. 다만 불교의 본질적인 근원적 가르침에 대해선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소설속에 등장하는 "아트만"이라는 개념은 힌두교의 개념이고, 부처님은 이 "아트만"을 부정하면서 세워진게 바로 "불교"이다. 그런데 부처님을 투사한 싯다르타라는 주인공 모델은 지속적으로 "아트만"과 "마야"라는 힌두교적 개념에 중요성을 두다가, 마지막에는 도덕경의 노자처럼 자연과의 합일,단일성을 주장하면서 결론을 내고, 그 결론을 불자 신도가 절을 땅에 세번 크게 박으며 칭송시키며 끝을 낸다.
이 소설에서의 주인공이 자칭 깨달은 바는, 전혀 부처님의 말씀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며, 어떻게 보면 불교에 대한 조롱 내지 모욕에 가깝다고 극단적으로는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이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봤다. 이 독일인 헤르만 헤세는 어째서 이런 짓을 한것일까?
헤세의 어린시절이 인도의 종교와 철학에 노출되어있던 환경이란 건 알겠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헤세는 기독교적인 가정과 사회에서 자라난 서양인이고, 그의 내면과 가치관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서구적 마인드 그 자체이다.
그런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살기도를 했을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이렇게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에 있던 그는 분명 어린시절 접했던 인도종교와 철학으로 정신적, 현실적인 도피를 한것이다. 이 도피는 인도를 넘어 중국의 노자와 같은 사상까지 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그러한 동양적인 사상들에 대한 탐닉은 그에 현실도피를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었을 뿐이지, 그의 내면은 굳건한 서양적 사고방식이 바탕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동양적이고 이질적인 사상을 -현실도피의 목적으로라도- 탐닉할 수록 본인에 내면적 가치관과 당연히 대립할 수 밖에 없었을 테고, 헤세는 그런 갈등을 해소할 목적으로 자신의 서양적 가치관을 토대로 불교와 힌두교와 노자사상등을 자기 나름에 사유적 결론으로 통일시킴으로써 내적 안정감을 얻어버렸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일인가?
이런 불안정하고 얄팍한 인간이 자기본위를 위한 텍스트 토해냄 따위가 정말 인류의 정신이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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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를 읽고 사유하면 사유할수록, 이 헤르만 헤세라는 독일인이 정신적 도피와 안정감을 위한 도구로써 얼마나 불교와 힌두교 노자를 사용했으며, 그렇게 사용할 수록 자신 내부에 서양적 가치관과의 대립과 갈등에서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생생히 그려진다.
이러한 헤르만 헤세의 현실 모습은, 소설속에 주인공 싯다르타가 부처를 만나면서도 그를 거부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겠다고 나가는 장면에서 헤르만 헤세의 심리적 상황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를 풀이하면, 주인공 싯다르타(헤르만 헤세 자신)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분명 옳고 그러한 옳음이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걸 직관적으로는 이해하지만, 내적 거부감(기독교적이고, 서양철학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그를 거부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서양적인 마인드가 본인 그 자체인데, 이를 부정하고 불교적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의 존재가 소멸될 것 같다는 누구나 경험하는 실존적 문제로 인해)
여기서 내적 거부감은 에고의 대한 자존심이자, 존재의 소멸감 이란 절박함에 의한 것이고, 분명 부처님 말씀이 옳음을 알지만 자신의 에고와 존재감을 놓을 수 없었던 헤세는 결국 두 가지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데.
부처의 가르침만이 옳은 가르침이 아니라는 첫번째와 자기 나름에 사유적 결론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고 동일시하는 두번째이다. -실제로 소설도 이렇게 전개되고 결론 내린다-
이 행위들이 바로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한 자위행위 그 자체이다.
이건 비단 헤르만 헤세 뿐만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인간들이 하는 행동인데, 간단히 설명하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대해 자기 나름에 설명을 하고 판단, 결론을 내림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이것은 아마 인간 진화에 따른 산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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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간단히 정리하자면, 헤르멘 헤세는 불교와 힌두교 노자사상으로 괴로운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시전했다. 그렇게 서양과 다른 미지의 것들(동양철학)에 탐닉하면서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었지만 그렇게 하면 할 수록 자신의 내부(서양적 가치관)와 당연히 대립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헤세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헤세는 서양적 가치관을 초월할 수 없으므로) .
그런 인물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은 결국, 자기 나름에 결론을 지어낼 수 밖에 없는데. 서양적 가치관의 시각으로써 힌두교와 불교 노자사상을 통일 하고, 이것이 자기 마음에 들때까지 사상을 제 입맛대로 바꾸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결론이 도출되면. 그 결론을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 것!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이 바로 이 소설 "싯다르타"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신이 그것이 사실이다! 라고 주장을 한다 한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일 뿐이지 사실일 수가 없는것이다. 그리고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어설프고 얕은 정신적 수작에 지나지 않음을 본인 스스로도 양심에 찔리듯 깨달을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나마 똑똑하긴 한 헤르멘 헤세는 본인의 주장이 "어설프고, 바보처럼 보이고 들리겠지만" 이라는 문장을 연이어 반복하면서 마치 이런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는듯 소설 끝자락에 사용한다. -아니면 그에 대한 방어직 기제로써 반박하듯 사용한것이거나, 둘 다 거나-
이건 무슨 10살 먹은 서양 백인아이가 현실이 너무 고달파서 동양의 문화에 탐닉하며 현실도피를 하다보니, 어느새 동양문화와 동일시 되는 자신에 대해 이전의 자신이 소멸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불안감에 의해서 서양적 가치 대로 동양의 문화를 자기해석 하여 맞춰놓고 이것도 똑같은거야 ! 하며 안심하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정말 한심하다는 기분을 넘어서 어이없는 감정까지 느낀다.
이런 사람이 노벨문학상 수상자고, 대문호라니.
물론 한 개인의 불안정한 정신을 통합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로써의 가치는 분명 있다. 그렇지만 이건 자위행위를 위해 동양의 철학을 반찬으로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근거가 빈약하고 잘못되었으니 그가 내린 결론 또한 깨달음은 커녕, 어떤 숭고한 정신 그 무엇도 되지 않는다. 그저 잘쳐줘야 듣기 좋은 신음소리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진정으로 불교를 이해했다면, 그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싯다르타 -헤세 본인에- 그 생각과 사유, 고통 그 자체가 실제가 아님을 깨닫고 진정으로 에고의 소멸, 존재의 대한 소멸감이 사실이 아님을 깨닫고, 현실에서 그의 정신병적인 문제도 극복하였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정말 멋진 소설 "싯다르타"를 읽고 감명 받았을 텐데. 진정으로 마음의 울림을 받았을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다.
쇼펜하우어 부터 니체, 헤르만 헤세에 이르기 까지 불교에 대한 불이해로 인한 혼란은 본인들 삶에서도 일어났지만, 그 이후의 후손들에게도 끼치는 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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