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5일 일요일

진짜 진짜 마음챙김과 진짜 진짜 위빠사나 - 아직도 남아있는 지독한 사이비 사기꾼들로부터 벗어나기 -




링크 :) 진짜 마음챙김과 진짜 위빠사나 - 멍청이들과 사기꾼들에게 속지 않는 법-
이라는 마음챙김 관련 글을 쓴지 벌써 어언 1년이 지났다. 시간이야 항상 빨리지나가고, 앞으로도 빠르게 지나가겠지만, 어째서인지 유독 이 글을 쓴 시점부터 오늘 까지의 1년이 가장 빨리 지난것처럼 느껴진다.

 그 지난 시간동안 정말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었고, 도움을 받으신 분도 상당히 있다고 하니, 괜시리 뿌듯하고 좋은 기분이 들기도한다. 위에 글은 마음챙김에 관한 정보가 한국의 인터넷상에선 한심할정도로 비루했기에 직접 그 정보의 항아릿속을 채우고자 쓴 글이며,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요량도 목적으로 하여 쓰인 글이다.

 사실상, 초심자도 아닌 입문자 주제에 쓴 글이였던지라(그런데 인터넷에선 이 입문자 보다 못한 사이비가 절대 다수로 판을 친다),어설픈 점도 많고, 미숙함이 묻어나는 글이지만, 이 글이 쓰여진 의도 -올바른 명상의 정도를 소개하는 것-에는 그래도 나름 충실했다고 부끄럽지만 자평은 해본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시동을 걸어, 달렸으면 이 글에 탄 승객들을 다음 정류장 까지는 확실히데려다 줘야하지 않을까 싶은 희한한 책임감에 마저 글을 이어 써보려 한다.
-코로나 때문에 가뜩이나 새로운 스트레스도 업데이트 되지 않았나? - 
그래서 최대한 힘 닿는 데까지 승객들을 다음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고, 스스로 시작한 일에 마침표 정도는 찍어 보겠다. 








***** 간단한 QnA 


Q.마음챙김은 무엇인가요?
A.마음챙김이란 서양의 학자와 의사가, 스리랑카-미얀마-태국등의 상좌부불교(즉, 초기불교)의 정통 수행방법인(부처님께서 이 명상을 통해 해탈을 얻으셨다는 '호흡명상-일명 아나빠나 사띠', 즉 위빠사나)위빠사나를 서양인 입맛에 맞게 재정립하여 우울증이나 불안 혹은 신체적 고통등에 문제를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사용하고 보급하여 효과가 있음이 -그것도 대단히!-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진지한 치료의 목적으로써, 현재 미국의 인지치료에서 각광 받으며 쓰이는 명상법입니다.
(그렇지만, 조현병이나 조울증 같은 위험한 정신병에는 왠만하면 마음챙김을 하지 마십시오. 문제가 더 커질 확률이 농후합니다. -아니 확실히 문제가 커집니다.- 마음챙김은 만병통치약은 당연 아니고, 정신치료의 대용품이 절대 아닙니다. 정신적 문제에 대한 마음챙김은 실제 검증받은 정신과의사나 최소한 박사학위 이상에 제대로 교육받은 전문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인지행동치료법입니다. 정신병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은 자기 임의로 하는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스스로 정신병을 치료하려는 요량으로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안찾아보니 모르는 겁니다. 위빠사나를 치료도구로 사용하는 정신과의사분들도 한국에 많습니다!! 그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상담을 받아보십시오.) 


Q.그럼 서양의 마음챙김과 위빠사나에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A.서양의 마음챙김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색체를 쫙 뺐습니다. 특히 업과 윤회, 팔정도와 삼학이나 5계 혹은 8계, 12연기나 사성제와 같은 종교적 이념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로지 위빠사나를 통해 육체적으로 빠르게 얻을 수 있는 실용적인 이익의 부분에만 초점을 둔 게 바로 오늘날에 마음챙김 입니다. 위빠사나는 애초부터 단지 스트레스를 덜 받고, 좀 더 성공하고, 똑똑해지기 위해 하는 명상법이 아닙니다. 위빠사나는 사실 '윤회를 끊기 위한' 명상법, 즉 '해탈'을 목적으로 한 명상법이지, 현대의 마음챙김 처럼 30분 운동하기 수준에 생활의 질을 좀 향상하기 위한 트렌디한 요가 같은게 아닙니다. 고로, 이제 좀 감이 잡히시겠지만 마음챙김과 위빠사나는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다릅니다. 마음챙김이 단지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마음상태가 되는 것을 위한 그 정도 수준에 것을 요구하고 노력한다면, 위빠사나는 그런 차원을 아득히 넘어서는 목표를 위한 수행방법 입니다. 이렇듯 마음챙김과 위빠사나 사이에는 정말 큰 간격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빠사나를 종교적인 것만으로 치부하여, 종교적 명상법 이라는 이유 때문에 꺼려한다든가 거부하려 하시면 안됩니다. 솔직히 말해 진짜 불교(즉, 초기불교)는 애당초 신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수행하여 스스로 깨닫는 실증적 방법론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이 명상법을 하든, 이슬람교도가 이 명상법을 하든 애초부터 상관 없습니다. 다만, 위빠사나를 자신이 믿는 신과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는 본인의 삶에, 또 사실로써도 오류기에 잘못이 됩니다. 애당초 마음챙김 자체가 이런 종교적 문제 때문에, 불교적 교리를 싹 걷어내고, 그 명상법만 보급된 것입니다. 그러니 정 종교적인 갈등이 일어 갈팡질팡 하신다면, 마음챙김만 하시면 되고, 서양인들 처럼 윤회에 대한 부담을 지우시면 됩니다)


Q.그럼 마음챙김과 위빠사나는 얼마나 다른건가요?
A.솔직히 말씀드리면, 위빠사나가 진짜 랍스터라면 마음챙김은 가공식품으로 만들어진 랍스타 맛살 정도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랍스타 맛만 내서 당장에 혹은 현실적인 이익만을 내면 되기에 굳이 손질도 버거운 진짜 랍스타로 맛을 내진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챙김은 그냥 위빠사나 맛이 나는 가공식품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맛은 비슷하지만, 본질의 클라쓰는 넘사벽으로 다릅니다.(진짜 랍스터와 랍스터맛 가공식품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로써) 그런데 위빠사나 처럼 진짜 '윤회'를 끊기 위한 출가 수도승들에 진중하고 경건한 수행이 오늘과 내일을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간신히 살아가는 현대 사회인들에게는 오히려 맞지 않을 수 있겠죠? 진지하게 '해탈'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신다면(농담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진짜 랍스터로 손질하고 요리해서 그걸 아침으로 먹고 출근하려 하지 않으신다면- 간단하지만 맛은 똑같이 날 수 있는 마음챙김으로 대응 하시는 게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마음챙김으로 재가공해 만든거지만요-


Q.그럼 마음챙김으로 수행을 하면 되나요? 왠지 위빠사나보다 못한것 같은데? 
A.아닙니다. 전부 자기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정신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제 멋대로 하는 게 아니시라면, 단지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하는 명상수준에 것이라면, 마음챙김으로 충분합니다. 오히려 위빠사나를 제대로된 수행처 -최소한 존경받는 스님 내지는 검증받은 명상 전문가- 에서 진중하게 수행하지 않으시면 안하니만도 못한 잘못된 결과를 얻기가 쉽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운동을 배우신다면, 또는 인생을 건 수능 공부를 해야하는 수험생이라면, 그 운동을 알려주는 강사의 이력이나, 수능 강사의 경력과 스펙을 꼼꼼히 따져볼것입니다. 이 강사분의 경력이 어떤지 진짜 제대로 배운 분인지 등을 말입니다. 위빠사나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오히려 골프나 수능강사 보다 더 경력과 실력을 따져봐야하는게 위빠사나 혹은 마음챙김 강사 입니다. 잘못된 싸이비 골프 강사나, 수능 학원 강사에게 잘못 걸리면 그 만큼에 피해를 입듯이, 잘못된 싸이비 영성술사, 마음챙김 강사에게 걸리면 물리적인 손해는 물론이고 마음까지 상당히 피폐해질 수 있습니다.(마음 상태가 크게 손상되어 회복이 안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간곡하게 말씀 드립니다. 제발 싸이비들에게 혹해서 돈과 마음을 사기당하지 마십시오. 그냥 간단한 호흡 명상만 제대로 해도 -이 정도는 충분히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단! 정신병이 있으신 분들은 치료 목적으로는 절대로 혼자 마음대로 하지마세요)- 여러분은 제대로 위빠사나든 마음챙김이든 명상이든 한 것이고, 할 수 있습니다.


Q.그럼 그 마음챙김은 어떻게 하나요?








***** 마음챙김을 하는 방법


 마음챙김을 이해하기 쉽고 더욱 용이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현대인류의 총아인, 과학의 언어로써 설명해보도록 하겠다.(여기서부터는 뜬금없이 반말체;)
현대 뇌과학과 신경과학에서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주류로써 이제 인정되는 사실)은

"우리가 자아, 에고라고 생각하는 것, 즉 나! 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

에릭 켄들이란 위대한 노벨상 수상자는 자신의 저서 '기억을 찾아서' 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틀렸다고, 우리의 이 존재감, 에고감, 나라는 환상은 그저 뇌의 특정 부분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실제로도 사실로써 증명이 되었다.

누군가는 아직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신이원론(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어있는데, 영혼이 육체보다 더 고차원 적이고 가치있다라는 고대의 사상)을 신봉해서,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으로써 -그는 기독교를 혐오한다고 주장하겠지만- 영혼은 있고! 내가 있고! 그것도 아주 제대로 있다고 주장할것이다! 그리고 유물론자들을 욕하며(진화론과 빅뱅이론을 거짓이라 욕하듯이), 내가 있다는 느낌! 그리고 내가 없다고하면 소멸될 것같은 이 극렬한 두려움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며, 다시 심신이원론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빠져들어가 그것만으로 만족해 하겠지만. 진실은 심신이원론이란 거짓이며, 나라는 자아감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진화적 과정에서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 생성된 뇌의 전략일 뿐이다.

'나'라는 건 없다.
당신이 이를 받아들이든 못받아들이든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다 끝난 일이고,
만유 인력의 법칙이나 엔트로피의 법칙 만큼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 무엇이 이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가?
누가 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의지를 내고,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하는가? 내가 없다면 내가 나쁜 짓을 해도 내 잘못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먼저, 당신의 행동은 그 행동을 하기전 뇌에서 이미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실험을 통해 이또한 증명이 끝난 과학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의지라는 것 또한 이미 결정된 결과이지 당신이 직접 선택해서 한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진화는 그러한 '무의식적 과정'들을 '인지'하고어떤 사유와 의지와 의도와 행동이 결정되었는지를 '알아차려서 확인하고, 재선택'할 수 있는 기능을 발달시켰다. 왜냐하면, 아무리 뇌가 행위와 의지를 미리 결정해서 그대로 움직이게 한다지만, 뇌 또한 완전하지 않다. 만약 뇌가 잘못된 전략을 세웠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생존성을 보장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 - 얼마든지 스스로 알아차려 조정할 수 있으니까. ;즉, 자유의지에 재정의가 필요할 뿐이지, '나'가 없으므로 법적으로 처벌을 안받아도 된다. 라는건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알아차려 인식하는 과정이 드물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 이부분 부터가 중요하다. 


뇌가, 모든 결정을 미리 해놨지만. 우리는 그 결정을 알아차려서 스스로 수정하거나 조정할 수 있다. 이 특정한 인식 부분이 우리에게 부여된 기능이고 - 이또한 뇌의 부위일 뿐이므로 엄밀히 따지면(관습에 따른) 내가 아니다. 손가락이 나인가? 발가락이 나라 할 수 있나? 이 인식 부분을 나라고 착각하는 것도 오만한 어리석음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뇌에서 결정한 일들을 인식하고 의지내어 재선택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뇌의 부위라는 것이다.- 이 기능이 바로 "마음챙김"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 즉, "알아차림"할 수 있게 해주는, 빅터 프랭클이란 로고스 테라피에 창시자가 말한 바로 그 "틈!" "존재의 틈새다!"








어떤 꿈을 기억할 수 있는가?
생생했던 그 꿈은, 꿈을 꾸면서도 그것을 꿈인지도 모른 채, 꿈속에 사건과 이야기와 꿈속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그걸 진짜 현실이라 착각한 채- 온갖 감정을 쥐어짜이며 농락당하다 꿈에서 깬다. 그리고 당신은 꿈에서 깼을 때야 그것이 꿈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한다. 그리고 꿈이란 우리의 현실을 모방하기에 -어떤 심리적 통합을 위해- 
꿈을 꾸면서도 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네 현실 모습과 같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꿈을 꿀때처럼, 현실을 꾸면서도 그게 현실인지 모른다.
그건 꿈속에서 정해놓은 시나리오대로 끌려가며 능욕당하는 사람 처럼,
그와 같이 현실에서도 -참고로 꿈에서 작용하는 뇌부위와 현실에서 작용하는 뇌부위가
얄궂게도 같다.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당신은 뇌의 노예고, 꼭두각시이며, 이미 짜여진 각본의 배우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이 세상은 연극과 같다고 한 것이다.- 
당신은 시나리오대로 끌려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 누군가는 여기까지 오면 '나'라는 게 없다는 생각에 대한 두려움과 허무감으로써 허무주의나 공허감에 빠질 수있다. 그런데 착각해선 안된다. '나' 라는 자아감이 없다는 것이지, 여러분의 이름, 존재, 그 자체가 없다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분명 실존한다.
 단지 우리 몸에서 각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수십조개의 세포들이 '생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같이 한데 뭉친 총체적인 활동으로서의 '나'가 있음으로 이해가 바뀌는 것 밖에는 없다!! 즉, 당신은 이 수십조개의 생명에 대한 총체적인 지휘자 - 맡은 바 부여받은 임무: 알아차려 인식하고 선택하는게, 심장에게 심장의 임무가 부여되듯 당신에게 부여된 임무이다- 책임이 있으므로, 더 나은 선택과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확실히 생존을 위해 이런 총합적인 사령관(전전두엽, 자아감)을 만들어 놓은건 진화적으로 영리한 전략이다. 그럼 이 영리한 전략에 따라 계속 에고감을 키우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아니다. 괜히 진화에서 마음챙김을 할 수 있도록 만든게 아니다. 사실 마음챙김도 명상도 알아차림도 마찬가지로 진화적 산물이고, 뇌의 영리한 또 다른 전략이고 더 상위에 있는 전략이다. 당신은 이제 이게 무슨 말인지 얼추 이해했을 것이다.  -

한번 합리적인 생각을 해보자. 여러분이 눈이 가려진 채 뇌에게 이쪽 저쪽으로 질질 끌려다니면서 뇌가 만들어낸 자아감에 빠져 그냥 좀비처럼 살아가면서 '이게 나야! 이게 바로 나의 에고야! ' 하면서 만족하며 사는 지금 현실의 모습과, 그 장님 상태에서 벗어나 뇌가 나를 어느쪽으로 이끄는지를 정확히 보면서, 뇌의 조종을 거부한 채,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살아가는 삶. 이 둘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다 생각하는가?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마음챙김을 해야 하는 것이고, 일단 '나'라는 게 없다는 뇌과학의 상식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뭔 수로 뇌의 연극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자! 바로 여기에서 마음챙김의 기능 -진화적 의도대로-이 발휘되어야 하는 부분인 거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아차리고(뇌가 어떻게 우리를 노예화 하여 멋대로 조종하는지를 알아차리고),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며, 꿈 속에서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 더이상 꿈에 휘둘리지 않듯이, 현실도 현실이란 사실을 깨닫고 현실에(정확히는 뇌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노예가 해방되듯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육체적, 물리적, 심지어 금전적으로도, 아니 인생 전체에서 엄청난 이익이 될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않나?)


- 고로 이걸 당신이 이해했다면 그 두루뭉실하고 난해한 개념인 메타인지에 대해 이해한 것이다. 이게 바로 메타인지라고 하는 것이고, 메타인지를 잘하는 사람이 더욱 성공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익히 잘알려진 사실이다. - 


 화가 나면 우리는 정신도 못차린 채 화에 끌려 분통을 터트리고,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그 안에서 헤엄치며 허우적 된다. 그때! 내가 화가 났음을 알아차리고, 그 화에서 빠져나와 그 화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면?(즉, 뇌의 결정된 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화에 휘둘리지 않고, 그 화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화가 '나'가 아니라, 단지 그 화를 일으키고 활성 중인 어떤 뇌부위에 전기적 신호반응일 뿐이라는 걸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화'가 '나'라는 착각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화'가 처음에는 나 였다가 유체이탈 하듯 빠져나가 바로 앞에 객관적 개체로서 놓고,
이를 봄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이고, 자유와 행복을 위한 한걸음을 내딛으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스트레스를 현저하게 줄여 참되고 이익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우리가 얻는 것이다.당신은 조금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마음챙김 방법을 알려준다면서 왜 이런 학술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만 줄줄 풀어놔서 스크롤을 계속 내리게 만드는가 하고 말이다.

어서 빨리 간단히 -요가 동작을 배우듯이- 마음챙김을 익혀, 그냥 돈 버는데에, 스트레스 해소하는데에 쓰고 싶을 뿐이다. 그렇지 않나? 아니 그렇지않다. 그래서는 안된다. 이런 분명한 개념 설명과 이해 없이 무작정 마음챙김 명상법이니 뭐니 하고 들이밀어대니 그것은 싸이비 마음챙김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통법규도 하나 모르면서 도대체 무슨 운전을 하겠는가? 정말 그런 상태로 운전하다간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말하는건 최소한의 교통법규, 우리가 서로 피해 입지 않기 위해 알아야할 기본적인 개념 설명인 것이다. 당신이 어쨌든 불교적 명상법에 발을 얹은 이상, 당신은 이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해하고 수용하고 나서 마음챙김을 시작해야 한다. 
- 명상을 떠나 이러한 과학적 지식의 습득은 당신 삶과 성장에 크나큰 도움이 될것이다. -






Q. 아잇!! 그래서 마음챙김 어떻게 하냐고!!! 뭘 해야 싸이비 마음챙김이 아닌건데?
A.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해해야할 게 있다. (물론 좀 길수도 있다.)

먼저, 애써서 하면 안된다. 어떤 강박에 빠져 완벽하게 하려거나, 제대로 하려고자,
당신이 언제나 그렇듯 악을 쓰면서 하려고 하면 안된다. 이건 정말 멍청한 짓중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다. 심지어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말하면, 그 마음을 편하게 먹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다. 고요해지라고 했더니 고요해지려고 애를쓰고,
초연한 마음을 가지라니 초연한 마음을 가지려 애를 쓰고, 차분한 마음을 가지라고 했더니 차분한 마음을 가지려 애를 쓴다. 세상에 이런 바보같은 짓이 또 있을까!

그러니 당신은 마음챙김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그 어떤 고요 한자락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선문답식에 두루뭉술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말은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걸 말해주겠다.

마음은(그러니까 뇌는) 한번에 한가지씩에만 신경과 주의와 집중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신이 고요해지기 위해, 마음챙김을 하기 위해 애를 쓰는 그 괴로움에 마음과 뇌는 집중되고, 주의를 기울이고 신경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편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볼수록 커지는게 뇌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간단한 예로써,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안올때를 생각해보라. 당신은 잠을 자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잠을 잘 수 없다. 잠을 자지 못하자 생기는 분노와 불안 스트레스는 신경쓸수록 더욱 커진다. "애를 쓸수록 더욱 안된다" 이건 인간 삶의 법칙이다. 마음챙김을 하란다. 마음챙김을 하려고 애쓸수록 이런 자연법칙에 의해 당연히 더욱 안된다. 괴로움이 불면증처럼 커진다. 그 괴로움을 다시 억압하고 외면할 수록(당신은 그것에 지금 집중하고 있다) 다시 더욱 커진다. 악순환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우리가 한곳에 하나만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런 괴로움에서 고갤 돌려 호흡으로 돌아가 집중하는 것이다. 이제 조금 감이 잡히는가? 이게 옳은 마음챙김이다. 그리고 마음의 특성상 당신이 호흡에 집중하면, 당연히 그만큼 괴로움에는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
(케이크와 만두를 동시에 먹을 순 없으니까. 뇌는 한가지에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러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사그라들기때문에 (주의를 기울이면 커지듯이 주의를 거두면 그 대상은 조그라든다.) 당신의 괴로움과 불면증, 불안 고통은 나도 모르게 없어진다. 바로 이거다!
- 즉 이 애씀 또한 그 애씀을 '인식하고 거기에 집중, 주의'하기에 이 애씀이 자각되는 것이다. 이 애씀에서 시선을 돌려 그냥 호흡에만 주의 집중하면, 신기하게도 이 애씀 또한 어느새 의식 저 멀리 뒤편으로 자동적으로 사라져 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호흡에만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이게 마음챙김이다. 멍청하게 붙잡고 놓아주질 못하고 끝까지 잡고 지켜보는게 아니다.그런데 싸이비 마음챙김 강사들은 손에 압정을 쥐고 꾹 손으로 쥐면서 그 고통을 지켜보라는 식으로 가르친단다. 그딴게 마음챙김 이란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마음챙김은 쥐고 붙들어 보는게 아니라, 알아차리면 놓아버리고 호흡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 다른 무엇을 더 잘 알아차린다. 우리가 처음에 호흡의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기울이면 신기하게도 호흡에 특성이 알아차려 진다. 예전에는 호흡에 대해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그런데 호흡에 마음을 두니, 긴 호흡도 있고, 짧은 호흡도 있고, 거친 호흡도 있고, 부드러운 호흡도 있고, 가볍거나 무거운 호흡도 있고 호흡이 모두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다가 다른 잡념에 빠져 마음이 방황한다. 괜찮다. 호흡명상-진짜 명상-은 "알아차림"을 위해 하는 거다. 그 잡념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림!" 하는 것 자체가 명상이고, 사실 이게 진짜 명상의 순기능이고, 이런 상태는 절망할게 아니라 오히려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 해야 한다. -공수레 공수거 식으로 좋게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이게 수행의 핵심이 맞다. 이걸 위해 명상 하는거다. - 그럼 그 잡념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잡념에만 마음이 방황하는건 아닐지도 모른다. 분노일지도 모르고, 고통일지 모르고, 괴로움, 슬픔, 성욕, 우울등에 마음이 빠져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스스로가 그 상태에 있음을 알아차린다.
(처음에 했던 개념설명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건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진짜 당신의 일부도 아니다. 그냥 뇌의 어느 부위 -편도체든 변연계든 대상회든-에서 작동한 것에 지나지 않고, 그렇게 작동하여 당신을 조종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떠올려 보자. 그래서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여 또 좀비화 되지 말고 알아차려 멀찍이 떨어져 보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그것이 그것이라 알아차리고 (분노, 우울, 욕정 등으로 이름을 붙여도 아주 좋다!) 알아차렸으면 미련은 훌훌 던져버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 호흡을 본다. 호흡을 알아차린다.

-아마도 당신은 수만번 정도 호흡에서 다른 대상으로 왔다 갔다 할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게 마음챙김 명상이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마라. 꾸준~하게 호흡에만 집중을 유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또한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한 -어쩌면 더 이치에 맞는 - 명상법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알아차림"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 "집중 명상"을 하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잡념과 여러 생각들은 알아차림의 "재료"가 되기에, 이런 잡념이 없으면 "알아차릴 것도 없는 것이 되버리기에, 알아차림 명상이 아닌것이다" 이제 이해가 되는가? 괜히 당신의 마음 편해지라고 좋은 소리를 해주는게 아니다 마음챙김은 당신 마음에서 일어나는(뇌에서 임의로 결정해 멋대로 조종하는) 상태를 알아차리고(잡념이든 감정적 분출이든) 호흡으로 돌아가 호흡에 집중해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결국 호흡도 알아차림의 기본적 재료로써 쓰는 것이다. 이제 머리가 번쩍 뜨이지 않는가?) 그러니까 호흡이든, 잡념이든, 무엇이든 당신은 그것을 하고 있다고 알아차려 그것을 분명히 알면 되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마음챙김을 하는지 당신은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을 테니, 하나의 과정을 단계별로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이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가부좌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의자에 앉든, 일상생활에서 잠깐 하든 상관 없다. 서서하든 걸으면서 하든, 밥먹으면서 하든, 정말로! 볼 일을 보면서 하든 상관없다. 그래도 일단 기본적 설명을 위해 명상의 기본 자세를 필두로 시작해보겠다.)

호흡에 마음을 둔다.
(초점을 코 끝에 두건,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두건, 인중에 두건 그런건 상관없다. 그러니 그런거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우리의 집중 대상은 '호흡 경험'이지, 코 끝 경험, 배에 움직임 경험이 아니다. 호흡의 일어남과 꺼짐만 알아차리면 되니, 자기 기호에 맞게 초점을 어디에 두든 편한대로 하면 된다. ~누구는 초점을 코 끝에 두라하고 콧구멍에 두라하고 배에 두라하고 다~ 쓸모없고 필요없는 소리다. 자기한테 편하고 가장 맞는대로 하는 게 정답이다.)

호흡을 알아차린다.
(근데 왜 항상 호흡을 기본 베이스로 할까? 호흡은 항상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즉 휴대성과 편리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꼭 호흡을 베이스로 안해도 된다. 걸을 때 발끝에, 아니면 들리는 소리에, 만져지는 감촉에, 어디든 알아차림 할 수 있는 대상을 기본 베이스로 삼아도 된다. 그런데 호흡이 가장 보편적이고 편리하고, 인지하기 좋으므로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무조건 꼭 호흡으로 해야만 하는게 아니다. 일상에서 마음챙김을 하기 위해서 지금 하고 있는 움직임에 아니면 보이고 들리고 맛보여지는 것에 마음챙김 해도 되는것이다. -)

호흡의 변화나 움직임 형태 등을 너무 애쓰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알아차려 본다.
(호흡이라는 게 집중해서 보면 또 신기하다. 긴 호흡이 있는가 하면 짧은 호흡도 있고, 부드러운 호흡이 있으면 거친 호흡도 있고, 모든 호흡(들숨과 날숨)이 다 똑같지 않고 각양각색이다. 이러한 신비로운 변화와 차이를 알아차려본다.)

잡념이 떠올라 마음이 호흡에서 벗어났다는걸 알아차린다. 
(이는 절망스러운 일이 아니라 우리가 고대하고 기대했던! 잡념에 대해 알아차림할 순간이고! 뇌에서 해방될 능력(뇌의 근육, 메타인지)을 키우는 기회가 될것이다! 잡념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잡념이라는 것을 알고 -잡념이라 이름붙여도 아주 좋다- 곧바로 호흡으로 돌아와 호흡을 다시 알아차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너무 고통스럽다! 그 고통스러운 후회와 번민, 고민이 떠올라서 마음이 태풍을 만난 듯이 어지롭고 진정되지 않는다!!!
(괜찮다. 이는 더욱 강력한 알아차림의 주재료가 될 것이다. 이를 여전히 알아차린다. 노인이 돋보기까지 껴가며 자세히 보려고 보면 안된다. 이런건 자세히 관찰하여 볼수록 - 볼수록 커진다! - 악화만 될 뿐이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알아차린다(그래, 고통이라고 이름붙여보자.) 고통.. 고통.. 후회.. 번민.. 알아차려 이름 붙였으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 호흡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신은 대단한 경험을 할 것이다. 그렇게 강력한 마음의 혼란이 지금은 도대체 어디로 간거지? 하고 의아해 하거나 아예 생각조차 안나게 될 것이다. 그저 지금 알아차리는 건 아까번 들숨보다 좀 더 가벼운 지금의 들숨이다. 드디어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뇌의 조종과 연극에서 당신은 그것이 연극과 조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당신의 의지로써 뇌에게 놀아나기를 거부한 것이다.)

당신은 10분, 15분, 20분, 25분, 30분, 아니 단 1분이라도 이런 명상을 다 마치고 눈을 뜬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일상 생활중에 고통과 분노, 불쾌한 감정에서, 통증에 대해서. 어떤 상황에서건 필요에따라 이러한 마음챙김을 해본다. 간략하게 해도 좋다. 불완전해도 좋고, 명상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좋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 명상을 하는 이유는 "당신의 뇌가 결정한 대로의 연극"이라는 걸 "알아차려" 그것과 "동일시" 하지 않고, 이런 좀비화에서 빠져나와, 호흡이나 들리는 소리 등에 주의를 돌려 그 호흡과 소리를 알아차림으로 인식을 대체하므로써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고 메타인지를 키워 더이상 익숙한 고통을 다시는 받지 않을 예방법을 스스로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명상을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이런 소기의 목적을 아득히 뛰어넘어, 더욱 강력한 인내력과 의지력을 얻고, 똑똑함과 영리함, 자기절제와 명확한 분석력과 판단력과 같은 지적능력 또한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부차적인 소득일 뿐이다.

뇌는 가소성이 대단히 큰 물질이기 때문에, 
당신은 이 명상을 꾸준히 하면 실제로 뇌가 변한다.
(PET이나 SPECT, fMRI로 뇌를 촬영해서 보면 실제로 진짜로 변해 있다!)

당신이 지금껏 당신을 괴롭혔던 정신적 문제에 앞으로는 괴롭힘을 받지 않는 뇌로 뇌가
실제로 변하고, 당신의 메타인지를 담당하는 회백질이 실제로 증가해 두꺼워져서 진짜로
전보다 똑똑하고 객관적인 사람이 되고, 여러 마음을 상하게 하는 어려움과 괴로움에 직면해도 이를 이겨나갈 인내력과 의지력이 실제로 존재하게 해주는 뇌부위의 활성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철저한 실증, 과학적 사고관을 철저히 갖춘 서양에 의사들이, 박사들이, 과학자들이 이 마음챙김 방법을 실제 치료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냥 불교라는 동양의 문화가 좋아서 환자들에게 이 방법을 쓰는게 아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시사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을 통하면 과학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과학자들이 인정해주고 있다는 이 사실 때문이다.






언어와 블로그의 한계상, 아직 해야할 말, 필요한 말이 더 있음에도 (사실 끝도 없는 배움의 연속이기에 끝도 없이 설명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점 양해를 바라고,

이제 마지막으로 1여년 동안 받아온 질문들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으로 길다면 꽤 긴 이 글도 마쳐보려 한다.


< 초월명상등의 다른 명상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전혀 안좋게 생각합니다. 돈을 주면 고유의 만트라니 뭐니를 주면서 그걸 염~ 하면서 명상하라 하죠? 그 만트라 없이 개 이름이나 아이돌 이름으로 염해도 효과는 같습니다.
돈 주고 배우는 명상은 저는 정말 극혐 합니다.
명상은 돈 거래를 통해 사고 파는 매매 대상이 아닙니다.

또, 확실히 해두어야 할게, 초월명상등의 힌두교식 명상은 위빠사나 명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정말 단 1도 연관성이 없습니다. 서양에서 하는 마음챙김은 힌두교 명상과 완벽하게 다른 초기불교의 명상법인 위빠사나와 연관된 것입니다. 그러니 힌두교 명상이나 한국 불교의 간화선 등의 명상과 마음챙김은 완벽히 다릅니다. 이 부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가 없다는 생각은 여전히 불쾌하고 기분이 안좋아요. 어떻하죠?>
기분이 안좋고 받아들이기 힘드시면 안받아들이셔도 됩니다. 명상하시는 분들은 꼭 완벽주의자 같아서, 마음을 놓는 명상을 해도 제대로 놓으려고 분주해 하십니다. 아닙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우면 그렇게 하지 마세요. 왜 꼭 항상 남에 말을 따르고 의지하려 하십니까? 부처님께서도 자기 말이 받아들이기 힘들면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의지하고, 자기 스스로 확립해야 합니다. 저는 그저 길을 안내했을 뿐입니다. 그 길을 걸을 것인지 말지는, 걸어도 어떻게 걸을 것인지는 모두 당신의 선택일 따름이고, 저는 당신이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길 기도할 뿐입니다.


<혹시 채널링을 하시나요? UFO와 일루미나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답. 꼭 명상관련글에는 '신지학' 신봉자(라 쓰고 신지학 종교인이라 읽는)들이 가끔 찾아와 이런 류의 댓글을 꼭 남기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위빠사나와 마음챙김은 '대령'이니 '아트만'이니 '브라만'이니 채널링이고, 에테르니 프라하니 지구라는 학교에 배움을 위해 윤회를 했네 마네 하는 그런 사이비 종교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분들은 제발 정신과에 가서 진지한 상담을 받아보시길 강권 합니다. 비하가 아니라 이런 사유일반은 정말 위험한 정신상태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 이렇게 명상하는게 맞나요? >
제가 호흡명상, 마음챙김 명상법에 대해 상세히 이글에 써놨으니 몇 번이고 읽으시며,
참고하시면 됩니다.


< 그런데 다른 데선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데요? 뭔가 좀 서로 달라서 헷갈리네; >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글에 쓴 호흡명상법은 전통적이고 스탠다드 입니다. 이 블로그에 가르침과 배치되는 마음챙김은 (사이비 까진 아니더라도) 분명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축구 하는 방법과 규칙이 어떻게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까? 옳은 명상방법은 절대로 서로 배치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쓴 명상법에 설명이 제가 발견한 것도 정립한것도 아니고, 저 또한 존경받는 대가의 말씀을 그대로 -물론 표현은 제 스타일로 해서- 알려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로 여기서 제시하는 명상법이 옳습니다.
그렇기에 이 명상법과 개념들을 모든 명상의 판단 근거로 사용하셔도 됩니다.


 < 명상이나 불교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들이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
저는 개인적으로 아잔 브람의 책을 좋아합니다. 그가 쓴 모든 저서를 추천하는 데 특히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놓아버리기" 두 권은 명상 수행자고 아니고를 떠나 인간으로써
꼭 읽어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유명한 스님이라, 그가 쓴 책들은 웬만한 지역 도서관에는 모두 있고 현재도 서점에서 인기리에 판매중이기에 꼭 탐독해 보시길 강권합니다.

또 부처의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틱닛한 스님이 쓴 "붓다처럼"도 꼭 읽어보세요. 소설형식인데 대단히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입문용으로는 전현수 박사가 쓰신 불교관련 서적들이 좋습니다. 최근에 읽은 "해커 붓다" 라는 책도 상당히 흥미롭고 좋았습니다.

 저는 존 카밧진이나, 골드스타인, 샤론 등 서양의 마음챙김 선구자들에 책은 별로 선호하진 않습니다. 물론 당연히 다른 책들에 비하면야 훌륭하지만, 그렇게 큰 울림은 잘 못받았습니다. 더더욱이 무슨 무슨 마음챙김법! 하는 유행 쫒는 책들 또한 읽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라 생각합니다.

 제가 봤을 땐, 마하시 사야도, 파욱 사야도, 아잔 브람, 아잔 차, 고엔카 등의 검증 받은 실제 수행의 대가들이 쓴 책들이 확실히 더 좋았습니다. 물론, 마크 엡스타인의 "진료실에서 만난 붓다"와 같은 비 전통적인 불교 관련 책들도 가끔은 좋은 통찰을 주기도 합니다.

<크리슈나무니 우파니샤드니 하는 책들이나 신지학 관련 책들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초기불교나 명상법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참고로 한국,중국,일본 불교하고도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기공이니 주역이니 하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 글에 많은 걸 담아내려다 보니 상당히 긴 글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정말 선의의 마음으로 정성 껏 써보았으니
도움이 되신다 생각되면 주워가시면 되고,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그냥 가셔도 됩니다.
그렇지만 어찌되었건 이 글을 통해 더 이상 싸이비 마음챙김 강사에게 최소한 휘둘리며
금전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손해 보는 일은 없으시게 되실 겁니다.

위빠사나를 진중하게 배우고자 하신다면, 진짜 제대로 검증받은 위빠사나 명상 센터로 가서 수행하십시오. 정말 제대로 배우고 싶다면 미얀마고 태국이고 못가겠습니까?
국내에도 대단히 수승한 수행처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검증은 본인 스스로 하셔야 합니다.
그것까지 대신 해드리긴 힘듭니다.

하여튼 이쯤에서 이제 글을 마치겠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행복을 찾기를 희망합니다.



댓글 40개:

  1. 저번에 마지막으로 댓글 남겼던 사람입니다. 소개해주신 링크를 타고 와서 글을 읽고 댓글을 남깁니다. 저번 글과 이번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을 많이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질도 많이 올라갔습니다. 감사합니다 ^^

    제가 전에 센터에서 '명상 중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림은 알아차림의 빛이 충분하지 못해서이니 더욱더 집중하라' 라는 말을 듣고, 집중하려고 노력했었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요즘은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 상태임을 알고 그런 감정이 나타나면 알아차림 상태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고 있구요. 그간 꾸준히 명상을 하였더니 직장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효용이 큰 부분은 오후나 저녁때 즈음에 불쑥불쑥 짜증이 치밀어오르던 거나, 저녁에 퇴근한 뒤에 무기력함을 느끼던 게 많이 좋아졌어요. 가족들도 요즘 변한 모습이 보기 좋다고 칭찬해주니 좋네요 ㅎ 작은 변화이지만 이것이 저에게나 제 가족, 주변인들에게나 긍정적인 연쇄반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 감사하고 행복한 주말 되시길 소망합니다. 종종 들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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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꾸준히 정진하셔서 꾸준하게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고통, 즉 둑카 입니다.
      명상은 수행이 점차 버거워지고 힘들어지다 못해 절망스러운
      순간도 분명 찾아 올 것입니다. 지금에 좋았던 기억은 어디가고 어느새
      명상이니 뭐니 짜증나고 더이상 참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팽겨칠만큼
      힘들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명상 조차 할 힘이 없을 때가 생길지 모릅니다.
      몸을 겨누지도 못할만큼 거대한 현실적 고통 앞에 이깟 명상이 소꼽장난 처럼 여겨질때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고통도, 괴로움도, 심장을 찢고, 혓바닥을 녹이고 뇌가 갈려지는 고통이 생겼을 때 그 고통을 그냥 받아들이세요. 명상을 하기 싫으면 싫은 마음도, 그냥 모든 걸 욕하고 싶은 그 마음도 모두 받아들이고, 외면하지 말고 애써 호흡으로 돌아가려 노력하지 말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그래. 알겠어. 같이 함께 있자." 라고 그 고통에게 말하고
      차츰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세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만약 생긴다면 이 댓글을 꼭 기억해주세요.
      고통은 태어난 이상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고통과 잘 있기 위해
      우리는 명상 하는 것입니다. 꼭 무조건 좋은 결과만 나타나야 한다고
      집착하지 마세요. 명상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좋은 상태에만 가기 위해 하는게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진창에서 끌어 올려지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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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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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여러 번 되새기면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당히 가치가 있는 좋은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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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갑습니다 ^^. 언제든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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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안녕하세요 귀중한글 잘읽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하신 호흡에 집중한다는 말씀이 잘 와닿지가않습니다. 호흡으로 인해 느껴지는 촉각이나 팽압같은 신체적 감각에 주의를 둬야하는건가요 아니면 그냥 호흡중인것을 인지하는것에 둬야하나요 잡념이 많은 상태에서는 단순히 호흡에 집중한다는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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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명상 경험이 그래도 조금은 있으신 분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보니,경험이 거의 없는 분들은 난해하다고 받아들이실 수 있습니다. 먼저, 호흡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 개념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본문에서 호흡에 집중한다는 뜻은, 호흡을 알아차림에 집중한다는 것이지 호흡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마타나 사마디를 위시한 집중 명상은 호흡 그 자체에 집중하지만, 위빳사나는 호흡의 알아차림에 집중하는 명상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당장 알아차림 명상과 집중 명상의 확연한 차이점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해보세요. 지금 님의 눈앞에 보이는 대상 아무거나 하나 선택해보세요. 커텐이든 TV든 벽지든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손바닥도 좋고, 발가락도 좋습니다. 하여튼 그 선택한 대상을 한번 뚫어져라 쳐다보세요, 판단이나 분석 생각 같은거 하지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쳐다보면 뭔가 알아차리시는 게 있으실 겁니다.

      '내 손바닥이 원래 이랬었나? 방충망에 패턴이 원래 이랬었나? 이게 원래 이렇게 생겼었구나!' 하는 알아차림이 있을 겁니다. 신기하실 겁니다.
      평생 써오고 봐왔다고 착각했는데, 제대로 보니 완전히 새로운 것처럼 느껴지실 겁니다. 지금 님은 그 대상을 '알아차림' 하신 겁니다.

      그럼 이번에 집중명상을 해봅시다. 손 끝에 계속 시선을 가져다 두시려고 분투해보세요. 계속 몇 분간 거기에 시선을 고정해서 집중하다 보면 그 손 끝에 완전히 고정되실 겁니다.

      즉 손 끝이 어떠한지를 새롭게 '알아차려' 보려는 의도로 봐서 알아차림 하는 것과, 단지 손 끝에만 시선이 고정되기 위한 집중은 이토록 다릅니다. 이제 집중명상과 알아차림 명상에 차이점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이해하셨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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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럼 이런 이해에서 호흡의 알아차림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주 쉽고 간단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명상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자 분들은,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봅니다.
      숨을 마실 때 배가 일어나고 숨을 내뱉을 때 배가 꺼집니다.
      이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보세요. 이 방법은 위빳사나의 권위자인
      마하시 사야도가 초보자 분들에게 제안하신 방법 입니다.

      명상 경험이 이제 어느정도 있으신 분들은 콧구멍의 입구에서
      들숨 날숨의 경험을 하세요. (알아차리기 힘들기에 더 어렵습니다)

      명상에 대한 이해도와 경험치가 어느정도 쌓이셨으면 제가 이 본문에서 쓴 명상 법대로 하시면 됩니다. 거친 호흡, 부드러운 호흡, 그냥 호흡 자체를 경험 합니다. 이 호흡을 경험한다는 뜻은 명상을 꽤 해보신 분들 아닌 이상 이해가 안될테니, 초보자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이 이상에 명상수행을 원하시는 분들은
      위빳사나 수행센터에 가셔서 더 전문적이고 고도화된 명상 수행을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초보자분들이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대상으로 명상하실 때, 그 배의 일어남과 꺼짐의 움직임과 경험을 알아차리셔야 합니다. 님께서 님의 손바닥을 보고 손바닥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하고 알아차리셨듯 봐서 알아차리시면 됩니다.

      어렵다고 느껴지시면
      그냥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집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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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순전히 저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말씀하신 글에서 본질을 이해한 것 같네요. 이해하고 나니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저 같은 초심자한테는 설명하기도 이해시키기도 상당히 난해한 개념인데 그저 대단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장문으로 답변 주셔서 감사드리며 텍스트로나마 제 진심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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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최대한 서로가 서로에게 깨달음의 도움을 주고 받으며 같이 깨달아 나갔으면 하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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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선생님 한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5장애(탐욕.나태.악의.들뜸.의심)가 올라올때 이감정이 5장애구나하고 알아차리는게 사띠이고 알아차려서 일단은 악감정.악행을 정지시키는것을 사마타 그리고 5장애 4바라이죄 (살.도.음.망)의 감정.행위에 대해 무상.고.무아. 그리고 생명에대한 해와 유익의 관점에서 사량.통찰하는것을 위빠사나라고 이해해도 문제가 없을런지요. 행으로 짓는 4바라이죄와 마음으로 짓는 5장애룰 끊어 번뇌에서 해탈하고자 할때. 번뇌직면시 위의 알아차림.정지.통찰과사량의 방법을 사띠.사마타.위빠사나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아님 제접근이 완전히 잘못된 것인지 궁금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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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불교의 전통적인 관점과 해석에 관해 물어보셔도 제가 초기불교의 수행승도 아니거니와 수행승이라 하더라도 그런 부분에 있어 가르침은 경험이 많고 검증된 학식있는 스승들이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님께서 제게 여쭙고 계신 부분에 대해선 저도 아는 상식선에선 어느정도 답해드릴 수 있기에 참고만 하시고, 제대로된 공부를 원하시면 관련 전문 서적을 읽어 공부하시고, 검증된 수행승에게 가르침을 받아보세요.

      먼저 사띠의 정확한 정의는 '기억(상기)' 입니다. 즉, '내가 호흡을 지켜보기로' 기억해서, 기억하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 호흡을 '알아차림' 합니다.

      누구는 사띠를 '주의 집중'이라 번역하고, 간단히는 '마음챙김' 혹은 '알아차림'이라 하지만 정확한 원뜻은 '기억' 다른 말로 하면 '상기' 입니다. 님께서 이야기하신 장애라는 대상에만 한정한 것만을 사띠라고 하지 않습니다. 님이 상기해서(기억해서) 그것을 하며 그것을 알아차림 하는 것 전체를 '사띠'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로, 삼독이든 다섯가지 장애든 무엇이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 자체를 사띠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띠는 그냥 '기억'입니다.(무엇을 하기로한 상기, 기억)

      그리고 제가 볼땐 행원님께선 전혀 완벽하게 잘못 이해하고 계십니다. 도대체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어디서 배우신건지요? 악감정 악행만을 정지시키는 것을 사마타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마타는 그저 선정! 즉 집중명상을 의미합니다. 꼭 4바라이죄라는 걸 멈추기 위해 하는 것만을 사마타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색계선정, 무색계선정에 과정에서 어떤 감정을 하나씩 버리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사마타의 단계입니다.)

      해와 유익의 관점에서 사량, 통찰하는 것을 위빠사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개념과 이해가 틀렸습니다.아마 대승불교를 공부하신 분이시겠지요? 저는 대승불교를 불교로 안봅니다.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위빠사나 사마타를 이해하시려 해봤자 절대 이해하실 수 없습니다. 대승불교는 불교보다는 힌두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님께서 진실로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공부코자 하신다면 대승불교는 과감히 버리시고 초기불교로 새롭게 다시 0부터 공부하십시오.

      진지하게 공부하실 수행처와 관련서적은 많습니다.
      초기불교의 전통적 관점은 절대 혼자서 멋대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정립하는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스스로 확립하라는 건 올바른 법을 토대로 확립하라는 것이지. 제 멋대로 해석하고 정리하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대단히 잘못된 이해를 하고 계신겁니다. 죄송하지만 님의 모든 개념은 전부 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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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안녕하세요 글 정말 잘 읽고있습니다. 벌써 몇번째 읽는지 모르겠네요ㅜㅜ 감사드립니다.
    다른게 아니라, 참나탐구라는 명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오롯이 현존하기 위한 명상으로, 마이클a싱어, 에크하르트톨레 등의 사람을 유튜브에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데, 그 내용이 마음챙김과 제가 느끼기엔 같은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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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절대 긍정적으로 안봅니다.

      '참나탐구'라는 건 '자아가 있고' '내가 있다'라는 힌두교(이전의 브라만까지 포함하면 정말 오래된)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 '참나탐구'가 틀렸다고 들고나오신게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마음챙김 입니다. (정확히는 위빠사나)

      그래서 이름부터 반불교적인 '참나탐구' 같은 건 무가치 하다 못해 무익하다 봅니다. 제가 초기불교도 라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타 종교를 배척하는게 아닙니다. '나' , '자아'가 없다는 게 과학적, 뇌과학적, 신경생리학적, 진화심리학적으로 모두 밝혀졌는데 도대체 그놈에
      참나(진짜 나, 아트만) 타령은 언제까지 할런지 참.. 카스트 제도가 끝나도 계속 될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렇기에 저는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나' 따윈 없습니다.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영혼! 아트만! 참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걸 어떻게 찾아내 존재하지도 않는 걸 위해 명상을 한다는 건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수준 낮은 명상으로 봅니다.


      또 에크라르트 툴레나 그 마이클 싱어나 기타 등등 유사 명상가들은 당연히 여기서 이야기하는 부분과 좀 겹쳐보일 수 있습니다. (잘 모르시는 초보자 분들에겐) 애당초 힌두교, 초기불교, 도교 여기저기에서 짬뽕 해서 취합시켜 강의하고 책팔이 하면서 돈 버는 분들입니다.

      그 분들에 대해 이야기 계속 할수록 좋은 언어는 나올 것 같지 않아 이정도까지만 적습니다. 하여튼 여기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신 분들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완벽히 다릅니다.

      어떻게 궁금증이 풀리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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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안녕하세요 혹시 호흡에대한 자각과 잡념이 공존할수도있나요?
    아니면 제가 수행방법을 잘못이해하고있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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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글
    1. 아마 잡념을 객관적으로 보신 상태를 경험하신 듯 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이전까지는 잡념을 '나' , '내가 하는 행위'로 보셨다가 잡념과 완전히 분리되어, 바로 앞에 대상을 보듯 잡념을 보신 경험을 하신 겁니다. 님께서 객관적인 관찰의 첫발을 내디신 겁니다.

      그런데 제가 볼땐 아르마다님은 여기에 쓴 글을 토대로 명상을 하시거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여러 정보들을 취합해 명상을 하시려는 것보단 진지하게 명상 센터를 통해 명상을 배워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아니면 최소한 위빠사나 명상 관련 책을 읽어보시고 하세요.

      담마코리아
      제따와나 선원
      혜안스님 명상센터

      과 같은 좋은 명상 수행처가 있습니다.
      (이곳들은 저와 1도 관련이 없고, 이곳에서 저는 수행한적도 없지만. 제가 알고 있는 가장 검증받고 수승한 명상 가르침 센터입니다.)

      아니면 먼저 관련서적을 진지하게 읽어 공부하시고 명상에 접근해주세요. 뭔가 대단히 잘못된 명상법으로 빠질 조짐이 다분히 보이십니다.
      독학으로 혼자 명상을 하고자 하신다면 위빠사나가 아니라 그냥
      간단한 호흡 명상만 하세요.;;

      명상 센터도 안가시고, 기본적인 전통수행법에 대한 공부도 없이 위빠사나 명상을 진중하게 하신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제가 여기서 소개한 명상법은 진짜 아주 아주 간단한 마음챙김 수준입니다. 그래서 대단히 가볍고 편한 마음으로 접근하시는 아침 스트레칭 정도에 명상입니다.

      이 이상 명상에 대해 계속 물어보셔도 저는 답변을 드리지 않을겁니다.

      진지한 명상을 하시고자 뜻하신다면 진지하게 공부하시고 믿을만한 스승 밑에서 진지하게, 마치 운동 코치가 운동 선수를 트레이닝 시키는 것처럼 명상을 배우세요. 그게 아니라 가볍게 접근하시는 것이라면 그냥 가볍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세요. 여기서 제가 쓴 글은 위빠사나란 명상에 1000분의 1도 안되는 개론에 반의 반도 안되는 소개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개론도 안되는 인삿말 수준의 소개글 정도에도 헷갈려하시고, 이를 토대로 제대로 명상하시려고 하면 저도 감당이 안됩니다.

      그냥 아침스트레칭 수준으로 명상을 하는 걸 택하셔서 가볍게 하시든지
      아니면 제대로 배우고자 하신다면 명상센터에 방문하시고, 진지하게 수행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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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궁금한게 있습니다.
    1. 많은 위빠사나 수행처나 영상에서도 불쾌한 감정이나 감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지나갈때까지 고요히 객관적으로 지켜보라고 합니다. 뇌과학적으로 볼때 이건 잘못된거 아닙니까? 주의를 기울일수록 감정은 더 강화될테니까요.

    2. 위빠사나 명상 자체가 감정이나 감각을 바라보고 무상함을 이해함으로써 해탈에 이르는건데 감정이나 감각이 일어남을 간략하게 알아차리고 바로 호흡으로 되돌아와버리면 감정과 감각의 생멸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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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러분. 여러분은 위빠사나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위빠사나라는 단어의 뜻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위빠사나가
      어쩌고 저쩌고, 위빠사나 명상이니 어쩌니 하면서 인터넷에서나
      오프라인에서 돈 받고 가르친다고 가르치는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님께서 말하시는 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마타도 이해하셔야 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한쪽 막대에 양 끝에 있는 것입니다.
      위빠사나와 사마타는 서로 다른게 아니라 같은 막대에 다른 끝쪽
      이란 겁니다.

      사마타는 뭔가요?
      위빠사나는 뭔가요?
      누가 위빠사나를 단순한 관찰이고, 사마타를 집중이라 합니까?
      그건 그냥 간단하게 사용하기 위한 요약식 이름붙이기 입니다.

      언제부터 위빠사나가 관찰이 됐습니까?
      언제부터 위빠산와 사마타가 다른것이 됐습니까?

      위빠사나의 주요 핵심 키워드는 '관찰'이 아니라 '알아차림' 입니다.
      그놈에 빌어먹을 관찰만 주구장창 하는게 아닙니다.
      왜 관찰합니까?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관찰이 손가락이라면, 알아차림은 달입니다.
      왜자꾸 손가락만 보십니까?

      달을 지시하기 위한 손가락 가르킴이 바로 관찰입니다.

      관찰을 위한 관찰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위한 관찰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알아만 차린다면 관찰을 하든 말든, 뇌과학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할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저는 지칩니다.

      위빠사나라는 단어 뜻을 모르면 그냥 사용하지 맙시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 우리는 모르는 것에는 차라리 침묵해야 합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척 잘난척 개념만 남발해대니 더욱 문제와
      개념만 꼬여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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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님을 포함한 많은 위빠사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분들이,
      언어적 한계, 에고적 한계에 직면해서 이해하기 어려워 하십니다.

      명칭과 뜻을 분류하고, 개념을 명확히 체계적으로 세워서
      머리로만 이성으로만 완벽히 이해하려 합니다.

      심지어 이해도 제대로 안됩니다.

      위빠사나 명상은 경험입니다.
      백날 천날 만날 구글에서 위빠사나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글을 읽고,
      무슨 무슨 수행처와 유튜브 영상이니 어쩌니 보고 듣고 배운다 애써도
      절대로 위빠사나의 첫 시작단어인 ㅇ 자도 이해 못합니다. 절대로!

      그냥
      간단해요.

      알아차리세요.
      무상 고 무아 삼법인을 알아차리겠다는 마음으로 위빠사나 명상을 하겠다고 하는 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가 우사인 볼트의 신기록을 깨겠다고 다짐하는 격입니다.

      그냥 호흡이라도 먼저 알아차려 보세요.

      위빠사나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자, 제대로 이해조차 못한
      싸이비들의 글과 영상들 보면서 헤매지 마시고,
      다 필요 없고

      부처님이 권유한대로
      한 줌의 호흡부터 알아차려보시길 바랍니다.
      님께서 갖는 의문, 의도, 생각 전부 부질없답니다.

      제발 한 번의 호흡만이라도 먼저 알아차리세요.
      그럼 모든 의문이 풀리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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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저도 이 부분이 가장 의문이네요... 아잔브람 스님도 알아차리고 자애로 대하며 그것을 놓아주셨고 고엔카스님도 알아차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놓아주라 하셨습니다. 간단히 알아차리고 넘어간다면 그건 사라지지 않고 사마타처럼 가라앉히는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명상이 끝나고 나서 에고를 건드는 어떠한 일이 발생한다면 깊숙한 곳에서 무의식적으로 반응이 꿈틀대겠죠.
      위빠사나와 사마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제 주제에 함부로 말씀드리기 껄끄럽긴 하나, 부처님 이전에는 다 사마타 수행이었고, 실제로 부처의 제자중에서 오롯이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깨달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정도면 사실 비슷하지만서도 다른 수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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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먼저 부처님 이전에 있었던 사마타 수행과 그로인한 비상비비상처 같은 무색계 선정도 분명 있었지만, 그걸 외도의 수행으로 이야기 하지, 부처님의 수행, 불교의 수행이라 하진 않습니다. 왜그런고 하면 외도의 사마타에는 삼법인과 사성제, 12연기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결여된 상태로 단지 무색계 선정만을 추구하는 수행법이기 때문에, 불교의 사마타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수행법으로 이야기 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사후 무색계에서 옳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경전에서는 묘사 합니다만, 뭐 이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차치하고.

      이 댓글에서의 핵심 문제를 이야기 하자면,

      아마 많은 분들이, 관찰하는 정도와 농도?, 방법론에 대해 많이 혼란스러움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잘 설명하지 않은 탓이 크겠죠. 그래서 이번 댓글에는 되는대로 정성껏 소상히 설명해보려 합니다.

      제가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계속 바라보면 그 부분이 활성화 된다는 뇌과학적 주장이란, 그래요. 최소한 10분 이상 한 가지 대상에 대해서만 계속 보면 그게 뇌세포가 되고 신경세포로 생겨난다고 분명하고 정확히 말씀드리면 이제야 무릎을 탁! 하고 치실 수 있으실까요?


      고로, 고통이나 괴로움 회한과 부정적인 감정을 붙잡고 10분이상 거기에 몰입하고 집중하고 관찰하면 -하여튼 거기에 있으면- 그런 상태를 담당하는 뇌세포가 활성화 되고 강화됩니다.


      그런데 수승한 스님들(고매한 스승들을 여기서 제가 언급하는게 참 기분이 찝찝함도 들지만)께서 말씀하신 알아차리면 놓아버리라는 건.
      최소한 그게 있음은 알아차리고, 알아차리면 놓아버리란 말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게 슬픔인지를 모르고, 분노인지를 모르고, 화인지를 모르는 채 그저 슬퍼하고 분노하고 화내기만 하면 어떻게 그게 슬픔이고 분노이고 화인지 알아차리겠습니까?

      정확한 워딩은, 호흡에 집중하고 있으면 어떤 여러 감정이나 감각과 생각이 일어남을 알아차리게 되고, 그렇게 알아차려야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겁니다. 그럼 최소한 그게 뭔지 1~2분 이라도, 2~3분이라도 그래요 하다못해 10분 미만으로 지켜봐서 무엇인지를 알았으면

      님께소 손에 쥐고 있는 게 유리이고 그래서 손에서 철철 피가 났음을 깨닫고 알아차렸으면 어째서 그걸 계속 붙잡고 있겠습니까? 심지어 10분 동안 그걸 쥐고 있으면 뇌세포에 유리에 박힌 피가나는 손바닥에 관한 뇌세포까지 생긴답니다.

      그럼 알아차렸으면 어서 놓아버리셔야죠.

      왜 그걸 계속 쥐고 계십니까.

      애초에 놓기 위해서 관찰하고,
      그것을 쥐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 관찰하는 거랍니다.
      그래서 알아차렸으면, 놓아버려야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 하는 위빠사나와 사마타에 수준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겨우 '생활체육' 수준의 마음챙김을 이야기 하는 거랍니다.


      위빠사나나 사마타,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 즉 8선정으로 나아가는 게 진짜 위빠사나고 사마타고 부처님 수행법이에요.
      그거는 진짜 전투를 하듯 치열하게, 하루 4시간만 자고 정말 처절할 정도로 수행하는, 스포츠로 치면 (생활체육으로 비유했으니) 프로 선수들 프로리그 수준에 일입니다.

      이정도 수준에 이야기에서 사마타가 어떻고 위빠사나가 어떻고 솔직히 거론하고 단정지으면 안됩니다.


      근데 이 생활체육도 제대로 이해못하면서도 수익화 하는 사이비들이 워낙 많기에 생활 체육 수준이라도 제대로 바로잡아보고자 쓴 글입니다.

      이정도면 어느정도 의문에 대한 해소가 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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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안녕하세요 글 너무 잘 읽엇습니다 전 다른것보다 숨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의도적으로 숨이 자연스럽게 쉬지는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숨을 쉬고 길이도 조종하게 되는데요 이게 잘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냥 숨쉬는걸 바라볼수 있는 방법같은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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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도적으로 숨을 쉬려는 모습을 관찰과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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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감사합니다 그렇게 노력해봐야 겟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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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안녕하세요. 실용적인 목적으로 명상에 관심을 갖다가 우연히 발견한 선생님 글을 보고 감명받았습니다. 궁금한게 있습니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정,꿈 ,노력 이런것들이 원동력이 되어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데, 불교 관점에서 보면 이런것들은 다 자아가 있다고 고집하는것이고 부질없는것으로 보는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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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 질문 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재가자들이 부를 추구하고,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을 오히려 장려합니다. 왜냐하면 그 신도들이 잘살고 자산이 많아야 그만큼 수행승들이 시주를 받음으로써 걱정없이 잘 생활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사람을 해하거나, 살생을 하거나, 인신매매나 무기 마약등과 같은 불법적인 일로 수익을 버는 것은 절대로 금합니다.
      정말 떳떳하고 정당하게 수익을 추구하는 것은 부처님께서도 장려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꼭 성공하고 많은 재물을 얻으려면 악착같이 노력하고, 욕망하고 욕심을 부리고 열망하고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자아나 에고, 자존심 자존감을 버리라고 하면 가난해지고 망하고 실패하고 인간구실을 못하는 산송장이 될거라고 착각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님께서 운전을 하고 있다고 합시다. 운전을 하시다가 누가 무리하게 끼어들어 사고가 날뻔 했습니다. 화가 나지요?
      내 자존심과 자존감을 건들고, 내게 위협을 했으니 분노를 터트리며 자아와 에고를 불태워서 상대를 짓누르고 복수하고 부숴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게 님께서 말한 열정, 꿈, 노력으로 포장된 에고적 욕망의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서 님께서는 그 본능과 에고를 따라 보복운전을 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 상대를 아주 비참하게 짓뭉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이게 성공한건가요? 자존감이 올라가고 자신감이 올라온건가요?

      오히려 다른 문제 더 큰 폭력으로 상황이 심각하게 전이되거나, 법적 제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자아, 에고가 없다고 여기면 산송장 처럼 될거야! 꿈도 희망도 없는 반병신이 될테니 절대로 그래선 안돼! 하는 상태로써 똑같은 상황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화는 똑같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이전과 같은 태도는 취할 수 없습니다. 화를 객관적으로 지켜보고, 화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지켜봅니다. 화가 사그라들고 자기자신을 더욱 잘 조절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화가 나, 자아, 에고가 아님을 알고 있고, 애초에 나, 자아, 에고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
      이해가 되시나요?

      자아, 에고, 나가 없음을 깨닫고 알아차려 봄으로써 오히려 더욱 잘 살 수 있습니다.
      님께서 거론하신 꿈과 목표는 오히려 이런 상태에서 더 이룰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왜그러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더 잘 절제하고, 인내할 수 있고, 상황을 판단하는 메타인지 기능이 작동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고, 그렇게 시행할 수 있는 전전두엽의 회백질이 실제로 더 두꺼워지고 활성화되서 실제로 수행능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로지 이전에는 짐승처럼 단지 본능에만 급급해서 전후상황은 조금도 생각지 못하고 일단 쾌락만을 추구했던 것에서
      이젠 진짜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필요한게 무엇인지 볼 수 있는 여유또한 생겼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에고적 욕망을 품어야 잘 살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진실은 에고적 욕망을 버려야 성공하고 꿈을 이루고 잘 살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본능적인 욕망이 아니라 진실로 객관적이고 넓게 볼 수 있는 이런 시야를 갖게되면 세상은 더욱 더 좋은 것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게 유일한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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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참된 평화가 함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긴 글 잘 읽고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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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첫번째 글에서는 분노,고통,괴로움이 느껴지면 그저 관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본질,속성이 무엇인지 파악하라고 하셨는데 이 글에서는 그냥 이름붙여놓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어떤게 맞는건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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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첫번째 글은 관찰을 통해 삼법인 까지 보라는 제안이였으나.
      너무 난이도가 있는 무리한 제안인 것 같아
      이번 글에서는 난이도를 낮춰 그저 이름붙이고 호흡으로 돌아오라고 다시 제안을 드린거에요.

      그러니까 처음 글에 제안은 삼법인, 즉 무상, 고, 무아의 본질 속성까지 보라고 했으나. 이건 솔직히 엄청나게 힘든 일이고 어려운 일이기에 초보자들이 할 수 없다는걸 깨닫고,
      이번 글에서는 초보자들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해 드린겁니다. 혼란해 하지마세요! 결국 같은 원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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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켜봄 - 알아차림(사띠) - 분명한 앎(삼빠잔냐) - 기억(사띠) 후 의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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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켜봐야(관찰해야) - 알아차릴 수 있고(그게 무엇인지) - 알아차리면 분명한 앎이 생겨요(무엇을 해야하는지,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 분명히 알았으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기로 기억해서(사띠해서) 다시 호흡으로 돌아갑시다. (의도, 의도는 우리의 업이 됩니다. 윤회의 재료가 되죠). 결국 모두 같은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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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명상으로 몸도 치유될 수 있다고 보시나요.
    발목이 군입대전부터 아팠는데 전역 하고도 계속 너무 아픕니다. 병원에서는 이유도 잘 모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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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명상으로 몸도 치유될 수 있다고 보시나요.
    발목이 군입대전부터 아팠는데 전역 하고도 계속 너무 아픕니다. 병원에서는 이유도 잘 모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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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좋은 글이지만 화가 잔뜩 묻어있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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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항상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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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정말 뛰어난 글 감사합니다.
    시중에 나와있는 마음챙김 책, 어플보다
    설명이 훨씬 정확하고 간결합니다.
    저는 Sysout님이 사이비 마음챙김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책, 영상에 넘어가 말씀하신 방식대로 하다
    훨씬 불안감이 커지고 신경이 과하게 예민해지는 부작용을 겪었습니다. 현재 알려주신 방법대로 명상을 하고 있고 조금씩 부작용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무상, 무아 개념을 못 받아들이고 또 알아차림과 놓아버림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음챙김을 하면
    스스로 고통을 더욱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연습밖에 안되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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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1:제가 마음챙김 명상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2:좀 뜬금없지만 미래기술과 인간 정신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싶네요.

    1:제가 마음챙김 명상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현재 이십대 후반이고, 4~5년전 즈음 우울증을 겪은 뒤부터 마음챙김 명상(혹은 제가 마음챙김 명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존 카밧진의 처음 시작하는 마음챙김 명상' 이라는 책을 읽고 시작했지요.
    나름 기간은 오래된 것 같지만, 사실 매일같이 꾸준히 하지는 않았고, 몇달씩 쉬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좀 많이 하기 시작했지요.
    최근까지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하다가, 제가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고 매몰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알아차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시기상조라 생각하고 요즘에는 호흡과 몸 명상만 하는 중입니다.
    저의 명상 과정에서 이해한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씩 읽어 보시고 틀린 것이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1.1: "애쓰지 않기" 에 대해
    제 경험으로는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알아차리고 있는 대상에 대해 주도적으로 뭔가를 '더' 느끼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호흡을 예로 들자면, 저는 호흡 명상을 할때 특정 신체부위에 집중하기보다는 공기의 움직임을 느끼는 편인데요, 저는 명상 중에 숨이 저의 비강을 스치는 순간과, 폐속을 채우는 느낌을 느낍니다. 이때 만약 제가 "애쓰지 않는" 다면, 제가 느끼는 이 감각을 비강에서 콧구멍으로, 또는 폐속에서 기도로 더 분명하게 느끼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냥 감각이 저에게 "던져주는 대로" 느낍니다. 굳이 저의 경험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경험의 내용에 신경을 쓰면 끌려가게 되니까요.
    또는 이것을 배나무 밑에 누워있는 것으로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음은 배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것만 먹는 것이고, 애쓴다는 것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배나무를 오르려 하는 것이지요.

    알아차림에 만족하지 못하고 애쓰려 하면 알아차림보다는 대상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1.2:알아차림과, 또 알아차림의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이해
    명상중에 저의 명상 대상(여기서는 호흡으로 하겠습니다)이 아닌 잡념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마치 책상에 앉아서 다리를 떨다가 내가 지금 다리를 떨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잡념을 알아차렸을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그러니까 제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강도가 없습니다. 빨랫집게에 코를 꼬집힌 것과,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은 것은 우리가 "느끼기" 에는 아주 큰 강도의 차이가 있는 고통들이지만, 우리의 뇌 속에서는 그냥 하나의 전기 신호일 뿐입니다. 뇌속의 빨랫집게 신호로는 LED 1개를 키고, 문지방 신호로는 LED 100개를 켤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또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잡념이 수학 문제라면, 그것의 본질은 종이 위의 그림일 뿐입니다. 대학 수학 문제든 초등 수학 문제이던 간에요.
    아니면 생각을 "저를 끌고가는 수레" 에 비유할 수도 있겠네요. 수레에 담긴 짐의 무게는 각기 다르지만, 어떤 수레가 나를 끌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나머지는 그냥 연결된 끈을 끊어버리면 되는 문제입니다.

    때문에, 제가 호흡에서 벗어났을 때, 다시 돌아오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떠오른 잡념(수학 문제) 에 대해, 문제를 읽을 필요도 없이, 그냥 종이를 던져 버리면 되니까요.
    이것이 제가 이해한 대상의 본질과 또 그것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실제 명상 시에는 절대로 위에서 말한 모든 명문화된 생각을 머릿속으로 따박따박 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챙김 명상을 어떠한 "감각"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오감과 생각을 어떤 객체로써 느끼는 "감각", 또 그것에 주의를 주지 않는 "감각" 등등...

    1.3:동시에 여러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
    명상 시에 자주 저의 알아차림의 대상이 하나가 아닌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호흡 명상을 할 때 두드러지는데, 저의 호흡을 알아차리고도 저의 주의가 "남는" 느낌을 받습니다. 왜냐면 머릿속에 다른 것이 들어찰 공간이 없을 정도로 남는 주의력을 호흡에 더 투자하면, 과도하게 대상에 매몰된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자연스럽게 남는 주의력은 저의 몸의 나머지 부분이나 생각을 알아차리는 데 사용됩니다. 요즘에는 더위 때문에 선풍기를 틀고 명상을 하는데요, 제 몸을 스치는 바람을 알아차리는 경우가 잦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혹시 제 방법에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걸까요?

    또 반대로, 제 몸 전체, 전신에 대한 명상을 할 때는 오히려 저의 주의력이 몸 전체의 촉각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을 느낍니다.
    제 몸을 스치는 선풍기 바람을 알아차리면, 자세를 유지하느라 힘을 주고 있는 등 근육이나, 허벅지와 맞닿은 손등 사이에 스미는 땀, 샤워 후 귓속에 고인 물은 제 주의에서 떠나갑니다.
    결과적으로 전신 명상은 수많은 전신의 촉각들 중 한두세개에 집중하거나, 또는 여러 대상을 그때그때 가장 강한 것부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제가 아직 전신 명상을 하기에는 숙련되지 못한 걸까요?

    1.4:공부도 명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공부를 컴퓨터로 하는데요, 때문에 쓰잘데기 없는 딴짓들을 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클릭 몇번이면 되니까요.
    이때 저의 순간적인 충동을 알아차리고, 다시 공부에 집중한다면, 이것도 명상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 명상의 종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2: 미래기술과 인간 정신의 관계에 대한 작성자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글에서 말씀하시기로 "자아" 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 협의체를 구성하는 뇌의 생물학적인 부분의 기능들을 기계로 점차 교체해 나간다면, 종래에는 사람의 정신이 기계속에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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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안녕하세요 :) 덕분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바른 견해로 수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제서야 많이 느끼고 있는데, 그 실체 모를 이유에 대해서 정말 자세하게 잘 설명해주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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