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에는 해묵은 -정말 오래된- 논쟁들 중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무아(자아가 없음)인데 어떻게 업보가 있고, 그 업보에 따라 윤회를 하는가?" 하는 논쟁 이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일반인들은 이 주제 부터가 상당히 난해하기 짝이없어 이해해 보려는 시도조차 포기하겠지만 (애초에 관심도 없으니 신경도 안쓴다는게 맞겠지만)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불교철학, 불교사상에 최소한 관심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이 주제는 그 어떤 주제보다 가장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는 언뜻보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 이기 때문이다.
일단 무아라 함은 이 피부껍데기안에 나라고 할만한게 없다는 관점인데 (이는 현대심리학 특히 진화심리학에선 사실로 판명되었다. 뇌과학이나 다른 과학적 실험결과도 같은 결론을 내놓았지만. 이글은 무아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주제로 한 글이 아니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무아는 사실이 맞다. 과학자들이 사실이라고 한다.)
나라고 할만한 존재가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누가 업보를 일으키고, 도대체 누가 그 업보를 받느냐 하는 것이다.
이건 마치 철학계에서도 쾌쾌묵은 논쟁중 하나인 자유의지가 있느냐? 하는 논쟁과 나름 유사성을 띄우는데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없다고 한다면 한 개인이 어떤 범죄를 저지른다 하더라도 그의 책임이 아니라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윤리적 도덕적 감정을 훼손하는 반문이 필연적으로 -항상- 뒤따라 오기 때문이다. (자유의지 또한 없다는게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지만. 이건 밑에서 설명하겠다)
즉 '나'라는 존재가 없는데, 도대체 누가 '올바른 행위'를 하고 할 수 있으며, 그 올바른 행위를 통해 누가 '업'을 지으고, 도대체 누가 '업'을 받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업에 따른 윤회를 하기 위해선 최소한 영혼과 같은 -영혼이 아니더라도- 어떤 고정적인 계속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불교에선 단연코 그런건 없다고 한다. 말이 안된단 말이다! '
그렇다. 이건 말이 안된다. 정말 말이 안된다. 어떤 변명과 수식어를 늘어놓든 이 두개는 확실히 서로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실제로 몇몇에 스님들이나 불교학자들도 이런 이유로 인해 무아와 윤회가 같이 할 수 없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하며 반박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나 또한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꽤 오랜 사유를 하고 또 사유해본 결과. 내 나름대로 대단히 만족할만한 이해를 하게 되어 여러분과 이를 공유하고 그 피드백을 받아보고자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이해한바는 이렇다.
부처님이 법을 '발명' 하신게 아니다.
부처님은 법을 '발견' 하신 것 이다.
결국 그 법이라는 것은 좀 더 세속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연법칙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업과 업에 의한 윤회가 진실이라 가정한다면, 부처님은 그 윤회의 자연법칙을 발견하시고 설파하신 것이다.
그리고 자연법칙은 충분히 역설적일 수 있고, 사실은 역설적이지도 않다.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예로든다면, 고양이가 어떻게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을 수 있는가? 이는 무아와 윤회처럼 상식적으로 볼 때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의 자연법칙 에서는 고양이가 죽어있으면서도 동시에 살아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역설이라 부르지만 사실 이건 역설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고정관념이 이를 역설 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역설이나 모순이라 생각하던 말던 자연은 원래부터 그러한 법칙에 따라 흘러 갔고, 가고있고, 가는 중일 뿐이다.
이런 사실관계를 놓고 본다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이 거짓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할 이유 또한 당연히 될 수 없다.
어차피 윤회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란 현대과학으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우니 최소한 어떻게 불교사상에서 무아와 업과 윤회가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논리적 전개를 하도록 하겠다 -애초에 이 둘(무아와 윤회가)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중점이지 윤회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점이 아니므로 -
일단 내가 이해하는 무아를 자세히 풀어본다면 이렇다.
생각이나, 감정, 느낌, 충동, 욕구등과 같은 것들을 일반사람들은 "이게 바로 나!" 내지 " 나의 것"이라 여기지만, 이들은 진화심리학 혹은 뇌과학적 측면에서 보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온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느낌이라는 것은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유전자의 전파를 더욱 용이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연선택에 의해 발달하게 된 것에 불과하고 이는 우리의 심장활동이나 혈액순환 처럼 생존과 자손번식을 위한 무의식적 기제일 뿐이며.
생각이나 감정 또한 뇌과학적으로 볼 때 그저 형성된 뉴런들의 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우리 안에 그 무엇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게 없는 것이다. 없을 수 밖에 없다. 진화의 산물로써 탄생된 무의식적 생명활동을 어떻게 통제하고 제어 할 수 있겠는가? 생각, 느낌, 감정, 충동, 욕구 따위가 바로 심장활동, 혈액순환, 소화작용과 같은 그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은 그 생각, 느낌, 감정, 충동, 욕구 따위가 이 머릿속 에서 생경하게 벌어지고 있으니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고, 나와 동일시하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여기기에 모든 고통과 스트레스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봐! 그건 너가 아니야. 너희 집에 찾아온 방문판매원처럼 저마다의 어떤 이유로 인해 그냥 문 두드리고 찾아온거라고!
이런식으로 하나하나 철저히 분석해나가면 진실로 "나"라고 부를만한 것은 없다는걸 깨닫게 된다. 그럼 "나"가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팔정도를 왜 따르고. 계를 왜 지키며, 선업을 누가 어떻게 쌓는다는 것일까?
여기서 부터가 진짜 무아의 핵심이다. 이를 이해하면 윤회를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자유의지에 대한 실험을 알고 있어야 더욱 충만하게 이해가능하니 간략하게 이야기 해주겠다. 세계적인 뇌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자유의지가 그저 아름다운 환상, 종교적 믿음에 불과하다는 걸 밝혀냈는데. 이유는 이렇다.
우리가 컵을 들거나, 일어서거나, 물을 마시고자 할때 그 행위들을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대로 행했다고 말하고 믿는다.
하지만 이들을 뇌영상장치에 넣고 보면, 물을 마시려 하기 몇초전에 이미 그 해당 뇌부위가 활성화 된다는 것이다. 즉, 뇌과학자들은 실험대상자가 무엇을 할지 정확하게 예측 할 수 있고 실제로도 예측하였다. 그러니 우리가 자유의지라 여겼던 것들은 우리가 전혀 인식 조차 하지못하는 차원에서 이미 결정된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이 실험결과가 또 그렇게 우리 마음을 후벼파는 절망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들은 덧붙여 말하기를 우리 행위가 정말 우리의 자유의지인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할지 안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 느낌 충동 욕구가 일어남을 심장이 뛰고 혈액이 순환하는 걸 막지 못하듯이 막을 수 없고, 그저 일어남을 보고 있어야만 하지만.
최소한 이를 "인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분별하며,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자유의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문제인 것이다.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저차원적인 논쟁에선) 무지한 사람들은 "그럼 이게 나야!" 라고 외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또한 "나"가 아니다.
그저 뇌 어딘가에 자리한 부위에서 기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또한 진화적 산물이다 -
파충류 뇌가 "나" 라고 할 수 없든, 번연계와 전전두엽 피질을 "나"라고 할 수 없듯 이런 인지적 기능을 하는 용도의 어딘가에 있기는 할 이 작은 뇌 부위와 그 기능이 "나"일 수 는 없는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정말 엄밀하고 철저하게 따지면 인지 인식 지각 알아차리는 나 또한 사실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이 기능을 통해 우리는 어찌되었건 팔정도를 행할 수 있고, 계를 지킬 수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으며, 의도를 내고 결정을 하고, 결심을 하며 행동을 하고 정진할 수 있으며, 이것에 의해 "업"이 생성된다.
이게 바로 무아다.
즉 이런 인지기능작용은 심장활동처럼 우리에게 자연이 부여한 어떤 하나의 인간적인 기능일 뿐인것이다. 심장기능과 다른점은 단지 의식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업을 짓게 하는 기능도 있다.
그렇다면 이 개념으로써에 진실된 무아가 어떻게 윤회와 공존될 수 있는가?
업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연이 부여한 인간기능인 자유의지적 인지과정에 의한 작용에 의한 생성인 "자연법칙 이라 한다면"
같은 이유로 우리가 다음 생에서 이렇게 형성된 업보에 의해 "내"가 없음에도 업보의 적용을 받아 "태어날 수 있다"는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많이 어려운가?
지구가 공전하는 것도, 모든 우주의 질서도 모두 설계된 법칙 그대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업과 윤회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업과 윤회 또한 그러한 설계된 법칙에 의해 인간이 이해하든 못하든 법칙에 맞게 담담히 작용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역설적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 그리고 무아의 성질 또한 자연이 부여한 기능에 불과하므로,
그리고 실제로 "나"라는 객체가 존재하지 않아도, 업을 생성할 수 있듯이, 같은 이유로 "나"라는 객체가 존재하지 않아도, 업을 받을 수 있는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부터 무아인 내가 업을 생성할 수 없어야 한다. 무아가 사실이 아니라면 모든 뇌과학적, 현대심리학의 실험결과 또한 정반대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무아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사실이다. 그리고 업의 범위를 전생 다음생 까지 확장하지 않고 이번생으로 좁혀서 이해한다하면, 충분히 무아임에도 "업"을 생성시킨다는 것은 사실이 된다. (업을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로 정의내린다음) 그리고 이번생에서 생성시킨 업을 이번생의 무아로써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개념을 현생이 아니라 다음생과 같은 윤회까지 확장시킨다고 뭐 다른 결과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제 결론이다.
<<무아인 상태에서 업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충분히 무아인 상태에서 업을 받을 수 있다. 현생에서 이는 사실이라 증명 되었으므로, 만일 윤회가 있다하면 다음생에서도 가능하다 볼 수 있다. 고로 무아와 윤회는 서로 양립가능하다. >>
무아와 윤회와 업이 서로 공존될 수 있느냐 마느냐는 이렇듯 논리적으로는 확실하게 증명되었지만, 실제로 윤회와 업을 믿느냐 마느냐는 증명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이다.
그래서 서양 불교에서는 서양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윤회와 업 개념을 제거하고 단순한 마음챙김 명상법과 무상,고,무아와 같은 자연법만을 위시하여 확장되고 있는데.
이것이 잘된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솔직히 윤회와 업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나는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진 않다.
또한, 이 글과 같이 무아와 윤회를 머리로는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할지언정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은 부처님의 위없는 경지이다. 테니스를 머리로 아무리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테니스 챔피언이 되는것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나듯이. 실제로 경험하는것과 이해만 하는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하지만 주장과 대화를 위하여 일단 최소한 머리로 이해를 하고자 한다면 이만큼이라도 명확하게 이해를 하긴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의 지혜로 말미암아 잘못된 논쟁이 이젠 걷히고, 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지식과분별력을 갖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