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9일 토요일

멍청한 대머리 사기꾼, 존 스튜어트 밀과 그의 자유론.




 존 스튜어트밀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그의 저서 '자유론'은 가장 훌륭한 '고전'들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권위와 비평에 나도 순종하여 그에 그 훌륭하다는 사상을 배우고자 '자유론'을 집어들어 순식간에 읽어 나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 수록, 그렇게 그에 사상을 이해해갈 수록 나는 그가 위대한 사상가도 아니며, '자유론'이 오류가 있는 궤변에 불과하다는 확신에 점점 차게 되었다.

 하지만 나라는 무명의 한 개인이, 이토록 칭송받는 사상가를 궤변론자, 제목 처럼 멍청한 대머리 사기꾼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까?

단순히 멍청한 대대수의 개인들 처럼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그를 그렇게 비판함으로써- 우월감을 가지려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도 나는 용기를 내어 내 주장을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 바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이기 때문이다. 또한, 밀도 힘주어 이야기했듯, 어떤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여러 토의와 토론과 각자의 비판적 사고의 교류를 통해 진실은 진실로, 거짓은 거짓으로 들어날 것이기에 전혀 문제될게 없다. 오히려 더욱 장려할 일이겠지.

 그러니 나는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대로 존 스튜어 밀을 비판하고자 하니, 이는 그 무엇보다 가장 타당한 행위일 것 이다.






 나는 기타 불필요한 문장의 사용없이 내가 할 수 있는 한 아주 간결하게 나의 논리를 전개 하고자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은 결국 이렇다.

 1)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각 개인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2)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각 개인의 자유는 존중받을 수 있다.


언뜻보면 진실 같다. 매우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바로 논리적 결함, 즉 전제를 무너뜨리는 오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피해라고 규정할것이며, 누군가에 권리적 침해를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권리적 침해라고 볼 수 있는가" 라는 아주 아주 아주 애매모호한 현실적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쉽게 풀이해보자면.


 "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누가, 다시 어떤 것을 기준으로 그 사상에 대한 피해가 있는지 없는 지를 또, 타인의 권리를 침해 했는지 그렇게 하지 않는지를 판단할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수치화, 정량화 -그렇게 하진 않더라도- 혹은 완전한 진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1) 즉 밀도 인정하듯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그렇게 그 불완전한 존재의 판단 또한 불완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고.

2) 어떤 이가 어떤 사상을 주장했다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또는 각 개인에게 직, 간접적으로 도덕적 혹은 윤리적 법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온전히 판단할 수 없다.

3) 왜냐하면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이나 행동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보일지를 어떻게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는가?" 결국 그 사상이나 표현의 자유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도래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3-1) 고로, 어떤 사상도 그 사상이 어떠한 피해를 야기시킬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가 가능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없는 지 자체를 우린 알수가 없는데 말이다.

3-2) 그렇기에 밀의 빈약하고 안쓰러운 변명대로, 우리는 이성과 사고로 그것에 피해의 양을 예측 하고 예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상의 자유를 논할 수 있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1)의 전제를 생각하라. 그 판단 또한 오류의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성적 예측을 통해서 어떤 사상의 자유는 합격이고 다른 사상의 자유는 불합격이라는건 엄청난 궤변이란 것이다.

4) 결국 우리는 어떤 사상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타인에게 피해를 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피해가 정확하게 육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유 무형의 피해를 총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더 더욱 이 피해라는 기준을 세울 수 가 없다. 사실 피해의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 안그렇겠나?

 어떤 자유로운 주장을 할 수록, 자유로운 행동을 할수록(아무리 조심한다고 한들) 그것으로 부터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 필경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금전적이든, 사상적이든, 정신적이든 무엇이든- 그럼 자유로운 사유와 의견은 어떤 누군가에겐 피해를 줄 수 밖에 없으므로 존 스튜어트 밀이 주창한 사상적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존재해선 안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

 그러므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의 표현이 성립하려면 그 피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설정해야 하는데.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우리는 그 피해가 정확히 얼만큼인지 또는 그것이 피해인지 완벽히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불완전한 판단과 그로 인한 예측 밖에는 없는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타인의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로운 사상과 표현이 존재할 수 있는가? 타인에게 무엇이 피해 인지조차 알수가 없는데 말이다.

 내가 100보 양보하여 설령 누구나 인정가능한 완벽한 피해의 기준이 존재한다고 전제 할지라도,  어떤 이에 사상적 자유로 인한 주장이 미래의 피해가 될 것인지 아닌지 우린 모른다. -마르크스, 니체의 사상 처럼- 알 수 가 없다. 모든 예측도 모두 빗나간게 인류 역사다.

 누가 알 수 있겠나?


 결론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1) 우리는 무엇이 피해(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인지 모른다.

 2) 사실은 그것이 피해(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3)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알려고 하는 노력 조차도 오류가능성이 필연적으로 내포되어있기 때문에 완전한 진실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이 피해이고, 그것이 피해인지 아닌지 알길이 없다.

 5) 무엇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인지 또, 피해인지 알지를 못하는데 도대체 무슨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자유로운 사상의 교환이 가능하단 것인가?

 그러니 존 스튜어트 밀의 말대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유롭다) 라면, 우리는 타인에게 어떤것이 피해를 주는지 아닌지 모르므로, 그 어떤 주장도 하면 안되는 것이고 그 어떤 자유도 가지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멍청한 대머리 사기꾼, 존 스튜어트 밀의 한계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는 자유가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를 들어야 내가 주장하는 바를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니까)

헐크호건이란 유명한 프로레슬러와 고커라는 유명 언론지가 소송을 벌였다.

소송의 이유는 헐크호건에 섹스 테이프를 고커라는 언론지에서 유포했기 때문이였다.

즉 헐크호건은 프라이버시의 권리 vs 고커의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제대로 맞붙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 대법원은 헐크호건의 손을 들어줬다.

 자 여기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나라안에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타인의 권리의 충돌이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모든 이야기가 이 사건에 다 들어가 있다.

 좋다.

한번 존 스튜어트 밀의 시각대로 풀어가보자.

 고커라는 언론지는 한 개인 헐크호건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커는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억압받아도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커는 이 사건으로 인해 파산하게 되었고, 수백만의 독자들과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란 가치에 실질적인 피해를 받았다. (언론사들이 이에 항의 했으므로)
 즉, 고커 또한 권리 침해를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법원의 그 자유로운 법리해석 또한 -사실 수천억원의 언론지를 파산하게 만든 것은 판사 혹은 배심원의 자의성 때문 이므로- 옳지 못한것이 된다.

 감이 오나? 이 얼마나 멍청한 논리적 오류에 끝없는 순환이 되냐 이것이다.

 결국 이쯤 되면 한 가지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즉, 누구의 권리가, 누구의 권리를 침해해도 가능하냐 혹은 아니냐 이다. 이게 바로 공리주의다.

 즉 헐크호건의 개인적 권리가 고커의 언론적 기능과 수백만 독자의 알권리 보다 더 크냐 작으냐에 따라서 작으면 억압받고 크면 반대쪽이 억압받는 단 식이다.

 그 둘을 저울질 해서 가장 올바르게 보이는 것(인간의 판단은 오류가 있으므로 그 판단이 사실이라 할수도 없음.)을 존중하고, 그에 맞는 여러가지 변명들을 덧붙이는 식이다.

이게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 200년전에 했던 아주 생각이 짧은 짓거리다.


 그럼 애시당초 부터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짓말, 사기를 왜 치는가?

 진실은,

 "본인의 권리가 타인의 권리 보다 더 우월하거나 인정받는 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할지라도(고커 라는 언론이 파산당한 것처럼) 공익을 위해(공리주의에 입각하여, 사실은 그에 대한 찬반 의견이 반반이라 할지라도. 최종결정자가 옳다고 여기면)서라면 그의 권리가 최우선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그 반대의견은 묵살될 수 있다(고커의 파산처럼)"

가 되버리는 것이다.


 씨발 장난하냐?


왜냐하면 결국 결론은


 "우리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자유를 갖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
"타인이 우리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자유라는 걸 갖을 수 있다는것이"
 진실이 되기 때문이다.

 >>피해라는게 정확하게 뭔지 측정할수도 없고, 알 수 도 없다. 측정할 수 없는걸 기준으로 자유의 유무를 따질 수 없다.

>>피해라는 기준, 근거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기준으로 자유의 유무를 논할 수 있는가?

>>설령 피해의 범위가 명명백백한 기준이 있다 할지라도, 서로의 권리가 상충되는 상황에선 이 명제는 성립될 수 없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무엇이 피해인지, 권리침해인지 우린 모른다.


 내가  이런 글을 씀으로 해서 자유론을 출간하는 출판사에게 독자한명분의 피해가 갔다고 치자. (독자가 나로인해 진실을 깨닫고 자유론이란 혐오스런 사기글을 읽지 않음으로써)

 그럼 나는 실질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준것이고, 권리를 침해한것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글을 쓰면 안된다.

 도대체 여기에 그 어떤 사상적 자유가 존재 할 수 있지?

 존스튜어트밀은 이렇게 말한다. 옳고 그름을 논하기 위한 글이였기 때문에 괜찮다. 이런 글들로 인해 무엇이 진실인지 더 분명해지므로 인해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이 글을 괜찮다라든지, 역사적으로 봤을 때 문학적 비평은 더 긍정적 결과를 냈다든가.. 이런식에 또 주석과 나름에 조건을 붙여서 이글만은 또 합리화 시킬거다.

 그러니까 이 씨발 존 스튜어트 밀 대머리 독수리 새끼야. 그렇게 모든것에 그런 예외적인 조건과 이유를 붙여야 한다면 애시당초 부터 "타인에 권리 혹은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 안되지.

 왜냐하면 나는 이 내 자유로운 사상을 통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음에도 그것을 면제 받는 예외적인 면제부가 주어졌습니까. 저 명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게 되는거란다.


 나는 정말 깊은 분노를 느낀다.

 이런 정말 모순에 가득찬 궤변론이 어떻게 2~300년 동안 읽혀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생각 없는 자들이 이런 궤변을 진리처럼 떠받들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지.

자유론을 번역한 어떤 병신새끼는 온갖 허세와 거들먹거림으로 이 자유론을 근간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이야기하는데. 정말 존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이해했다면 그 "국가보안법"은 절대 폐지되어선 안된다라는걸 죽어도 이해 못하고, 잘난척 하는 옮긴이의 말을 읽는 것도 참 고역이였다.


 대머리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